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이 여섯 개의 질문으로 풀어낸 백남준의 미디어 철학. TV를 넘어 오늘의 AI 시대까지 이어지는 예술의 통찰.
백남준의 TV 예술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 미래는 지금이다 "
백남준
"TV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백남준의 질문들을 따라가며". 채연 학예연구사가 강연을 소개하고 있다.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 여섯 개의 질문이 시작된다
2026년 6월 24일 오후 7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다원공간에서 MMCA 아카데미 시즌2의 마지막이자 여덟 번째 강연이 열렸다. 강연자는 박남희 백남준아트센터 관장. 채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가 진행을 맡았다.
박남희 관장이 단상에 서자 슬라이드에 백남준이 TV를 머리 위로 들어올린 사진이 떴다. 그 위로 제목이 겹쳐졌다. "TV는 예술이 될 수 있을까? 백남준의 TV와 예술."
이날 강연의 출발점은TV가 아니라 '질문'이었다.
여섯 개의 질문 슬라이드.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 백남준이 마주한 세계 - TV란 무엇이었는가
백남준예술가 슬라이드 - 1973년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강연은 먼저 백남준이 활동을 시작한 시대를 짚었다.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과 독일에서 미학과 음악, 철학을 접하며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당시 TV는 막 대중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미디어였다. 1926년 기계식 TV, 1927년 전자식 TV가 등장했고, 1930년대에는 독일에서 올림픽 경기를 생중계하며 일상 속 매체로 자리 잡았다.
박남희 관장은 "백남준은 TV를 단순한 전자기기가 아니라 새로운 예술 언어로 바라봤다"고 설명했다.
독일에서 존 케이지를 만난 경험은 그의 예술 세계를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이후 백남준은 기술과 예술, 인간과 미디어의 관계를 탐구하며 비디오아트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나갔다.
예술가(Art/ist)의 역할 변화를 설명를 설명하는 박남희 관장의 모습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박남희 관장은 예술가의 역할 변화도 함께 짚었다. 과거 예술가가 주술과 치유, 권력의 역할을 수행했다면 오늘날에는 학자와 과학자, 기록자, 창조자, 개발자, 미래학자, 소통자로 확장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백남준은 이 모든 역할을 동시에 실천한 예술가"라고 평가했다.
Q1. TV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가 - 조작, 참여, 쌍방향성의 시작
첫 번째 질문은 'TV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가'였다.
박남희 관장은 1963년 독일 부퍼탈 전시를 예로 들며 "백남준은 TV를 보는 대상이 아니라 만지는 대상으로 바꿨다"고 설명했다. 자석과 회로, 마이크 신호로 화면을 변화시키고 관람객의 움직임과 목소리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이는 미디어의 수동적인 수용자를 능동적인 참여자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당시 이론에 머물렀던 쌍방향 소통을 예술 작품으로 구현한 사례라는 설명이다.
이어 공개된 영상에서 백남준은 "TV를 옆으로 세워 놓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하며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집는 발상의 출발을 직접 들려줬다.
1963년 갤러리 파르나스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포스터 슬라이드.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Q2. TV는 시간을 어떻게 다루는가 - 비디오 아트와 방송의 접점
"비디오 매체의 본질은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다루는 데 있다"고 박남희 관장은 말한다. 회화가 하나의 이미지를 고정한다면, 비디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미지를 전개하는 매체라는 것이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의 뉴욕 방문이다. 백남준은 당시 소니 포터팩으로 현장을 촬영한 뒤 그날 저녁 곧바로 상영했다. 방송사가 아닌 예술가가 직접 현실을 기록하고 전달한 첫 사례로, 비디오아트의 출발점이자 미디어를 예술의 영역으로 확장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 슬라이드-1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 슬라이드-2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이어 1969년에는 슈야 아베와 함께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했다. 여러 영상 신호를 실시간으로 혼합하고 변형할 수 있는 장치로, 이후 비디오아트 발전의 기술적 기반이 됐다. 박남희 관장은 이를 "예술가가 미디어 기술을 창작의 도구로 바꾼 결정적인 시도"라고 설명했다.
Q3. TV는 몸이 될 수 있는가 - 로봇, 신체
TV는 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슬라이드를 열강중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백남준에게 TV는 단순한 화면이 아니다. 그것은 조각의 재료이고, 무엇보다도 인간 신체의 연장(extension)이다."
세 번째 질문은 'TV는 몸이 될 수 있는가'였다.
박남희 관장은 "백남준에게 TV는 단순한 화면이 아니라 조각의 재료이자 인간 신체의 연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미디어를 인간을 대신하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확장하는 존재로 바라봤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작이 샬럿 무어먼과 함께한 〈TV 첼로〉다. TV를 첼로 형태로 쌓아 연주하는 이 작품은 미디어와 신체, 음악과 기술이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협업은 예술의 자유에 대한 논의로도 이어졌다. 1967년 공연 중 샬럿 무어먼이 체포된 사건은 표현의 자유와 예술의 경계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됐으며, 박남희 관장은 이를 "예술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작품 〈로봇 K-456〉은 인간 크기의 로봇으로, 기술과 인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1982년 뉴욕에서 자동차와 충돌한 퍼포먼스는 기술 문명에 대한 백남준의 시선을 드러낸 대표적인 작업으로 소개됐다.
Q4. TV를 쌓으면 무엇이 되는가 - 달은 가장 오래된 TV
네 번째 질문은 'TV를 쌓으면 무엇이 되는가'였다.
박남희 관장은 백남준의 대표작 <TV 부처>를 통해 TV가 단순한 영상 장치가 아니라 사유의 공간이 된다고 설명했다. 카메라가 부처상을 촬영하고, 그 영상이 바로 앞 TV에 실시간으로 나타나는 구조다. 부처는 자신의 모습을 끝없이 바라보고, 관람자는 그 순환을 함께 마주한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이라는 시간이 작품 속에 머문다.
백남준 〈TV 부처〉, 1974(2002).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박남희 관장은 "백남준에게 달은 인류가 가장 오래전부터 바라봐 온 스크린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연과 기술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미디어로 바라본 백남준의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달은 가장 오래된 TV〉 작품 슬라이드.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Q5. TV는 우주와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가
다섯 번째 질문은 'TV는 우주와 세계를 연결할 수 있는가'였다.
박남희 관장은 1977년 카셀 도큐멘타 6에서 백남준이 인공위성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미디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이후 위성을 활용한 대형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됐다.
대표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뉴욕과 파리를 위성으로 연결한 생방송 예술 프로젝트다.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텔레비전을 통제의 매체로 그렸다면, 백남준은 같은 해 텔레비전을 소통과 창조의 매체로 바꿔 놓았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 슬라이드.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슬라이드에는 박남희의 핵심 주장이 떴다.
이어 소개된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CRT TV 12대로 달의 위상 변화를 구현한 작품이다. 박남희 관장은 "백남준에게 달은 인류가 가장 오래전부터 바라 봐 온 스크린이었다"고 설명했다. 자연과 기술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미디어로 바라본 백남준의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Q6. TV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가
여섯 번째 질문은 'TV 이후에는 무엇이 오는가'였다.
박남희 관장은 "백남준은 예술가이기 이전에 미래학자였다"고 말했다. 그가 남긴 많은 예측은 오늘날 현실이 됐다.
백남준의 TV 예술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1973년 백남준은 "언젠가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TV 채널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유튜브와 팟캐스트, SNS 플랫폼은 그 예측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어 1974년 '전자 초고속도로(Electronic Super Highway)'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TV와 비디오, 위성, 광섬유를 연결하는 미래 네트워크를 전망했다. 박남희 관장은 "오늘날 인터넷과 디지털 네트워크를 50여 년 전에 이미 예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최초의 휴대용 TV> (1973)는 오늘날 스마트폰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으로 소개됐다. 손안의 작은 화면을 통해 언제 어디서나 세상과 연결되는 오늘의 미디어 환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백남준 〈최초의 휴대용 TV〉, 1973.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강연을 마무리하며 박남희 관장은 "백남준의 질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미디어를 둘러싼 권력과 알고리즘, 접근성과 같은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는 과제라고 강조했다.
백남준의 질문, 다시 현장으로
강연 말미 박남희 관장은 오는 7월 16일 백남준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제1회 백남준미디어아트페스티벌(NJP Media Arts Festival)'을 소개했다. 형광 초록빛 TV 모양 로고를 내세운 이번 페스티벌은 백남준이 남긴 미디어 정신을 오늘의 시대로 확장하는 새로운 출발점이다.
제1회 NJP Media Arts Festival 슬라이드. 2026.7.16.~ 백남준아트센터.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1963년 TV를 예술의 재료로 바꿨던 백남준의 실험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있다. 박남희 관장은 백남준의 예술이 과거의 기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새로운 창작과 연구로 이어지고 있음을 소개하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 기자의 눈
국립현대미술관 MMCA 아카데미 시즌2 마무리하는 현장공간 ⓒ엄미영 미술전문기자
4월부터 6월까지, 여덟 번의 수요일 저녁.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다원공간에서
이어진 MMCA 아카데미 시즌2는 한국 실험미술의 흐름을 따라가는 시간이자, 예술이 시대와 어떻게 만나고 변화해 왔는지를 돌아보는 과정이었다.
강연자도, 주제도, 시대도 달랐지만 하나의 흐름은 분명했다. 임근준은 한국 실험미술의 출발점을 짚었고, 이건용은 몸 자체를 예술의 언어로 제시했다. 유홍준은 민중미술의 현장을 증언했고, 신학철은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임동식은 자연 속에서 이어온 50년의 작업을 들려줬으며, 김홍희는 한국 여성미술의 역사를 재조명했다. 최정화와 최미경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물었고, 박남희는 백남준을 통해 기술과 예술, 그리고 미디어의 미래를 조명했다.
여덟 번의 강연이 공통으로 보여준 것은 예술의 역할이었다. 예술은 시대를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시대보다 먼저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왔다.
오늘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많은 변화는 누군가의 실험과 도전에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낯설고 이해받지 못했던 시도들이 시간이 흐르며 하나의 예술사이자 동시대의 문화가 됐다.
MMCA 아카데미 시즌2는 한국 실험미술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는 강연이면서 동시에 앞으로의 예술을 생각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여덟 번의 강연은 끝났지만, 질문은 끝나지 않았다.
예술은 언제나 시대보다 먼저 질문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왔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절반은 자연이고 절반은 기술이다.
기술만 있으면 전쟁을 만들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강한 인간적 요소가 필요하다."
- 백남준
8회의 기록, 하나의 질문.MMCA 아카데미 시즌2를 통해 한국 실험미술의 흐름과 시대를 앞서 질문해 온 예술가들의 시선을 기록했습니다.강연은 끝났지만, 예술이 던진 질문은 계속됩니다. ⓒ엄미영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