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익대 HD LAB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인출하기》, 9월 5일 을지로 하트원 개막
프리즈 서울·키아프 서울 개막 주간, '선별'의 구조를 되묻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인출하기》 메인 포스터. ⓒHD LAB 제공
우리는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삭제하는가.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 HD LAB이 기획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인출하기(Cashing Out Schrödinger's Cat)》가 이 질문을 정면에 내걸고 오는 9월 5일부터 27일까지 서울 중구 을지로 하트원(H.Art1)에서 열린다.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서울이 나란히 개막하는 9월, 동시대 미술이 가장 활발하게 유통되는 시기에 '선별'이라는 행위 자체를 화두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아트페어 주간의 화려함 이면을 되짚는 담론적 장치로 읽힌다.
■ 은행이었던 곳, 수장고가 된 곳
▲ 을지로 167, 하트원(H.Art1) 전경. ⓒESQUIRE KOREA / HD LAB 제공
전시가 열리는 하트원은 하나은행이 을지로기업센터 지점을 리모델링해 2022년 개관한 개방형 수장고 기능의 복합문화예술공간이다. 2층 개방형 수장고에는 약 200점 이상의 소장품이 상시 보관되며, 3층은 작품 보관 및 VIP 프라이빗 공간, 4층은 다양한 기획전이 열리는 공간으로 운영된다. 과거 금융기관이었던 이 장소가 예술을 보존하고 공유하는 곳으로 전환됐다는 사실은 단순한 공간 이력을 넘어 이번 전시의 개념적 출발점을 이룬다.
"은행은 수장과 인출이라는 두 개의 상반된 움직임을 통해 작동한다. 가치 있다고 여겨진 것은 안으로 들어와 보관되고, 필요한 순간에만 다시 바깥으로 나온다. 그 과정에서 어떤 것은 오랫동안 잠든 채 남고, 어떤 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점차 사라진다."
- HD LAB 기획팀
전시는 이 '수장과 인출'의 구조를 현대 사회에서 기억과 가치가 선택되고 배제되는 메커니즘으로 확장해 바라본다.
■ 관측되지 않은 가능성 - 전시 제목의 물리학
전시 제목이 차용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관측되기 전까지 삶과 죽음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는 양자역학의 사고실험이다. HD LAB은 이 개념을 빌려, 사회 시스템 밖으로 밀려난 기억과 사물, 감각 역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아직 발견되지 않은 가능성의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도시는 개발과 재개발을 거치며 수많은 기억을 지워 나가고, 데이터 시스템은 정보를 저장하는 동시에 일부를 노이즈로 분류해 삭제하며, 자본은 노동의 가치를 계산하지만 감각과 경험, 관계는 쉽게 수치화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전시 전반을 관통한다.
■ 다섯 개의 방법론, 하나의 화두 - 작가소개
▲ 김이화, 〈Intertidal Nomad〉, 아크릴구·아연스틸·카본스틸과 패브릭 등 혼합매체, 2025. ⓒ김이화 작가 제공
김이화는 향, 사운드, 빛, 영상, 설치를 결합한 장소 특정적 작업으로 특정 장소에 축적된 기억과 공동체의 서사를 감각적 경험으로 전환해왔다. 런던 왕립예술대학(RCA)에서 동시대미술실천을 전공한 그는 이번 전시에서 도시에서 채집한 이미지와 기록, 언어의 파편을 연결해 사라진 공동체의 기억과 도시의 단면을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 호출한다.
▲ 김정은, 〈스핀-스팟 Spin-Spot〉, 씨알콜렉티브, 서울, 2025 전시 전경. ⓒ이의록 / HD LAB 제공
김정은은 이동의 과정에서 축적되는 경로와 리듬, 감각적 진동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지도와 이동의 궤적, 점과 선의 데이터는 공간 구조 탐색과 개인의 주관적 매핑으로 확장되며, 조형과 키네틱 구조, 빛과 움직임의 언어로 전환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도시의 객관적 데이터와 개인의 경험을 중첩해 재개발 속에서 지워진 기억을 복원한다
▲ 남다현, 〈Jeff Koons Special Sale〉, Variable installation, Mixed media, 2023. ⓒ남다현 작가 제공
▲ 남다현, 〈Small Mountain Series〉, Trash in trash bags, Styrofoam, 2025. ⓒ남다현 작가 제공
남다현은 차용과 패러디를 조형적 언어로 활용해 예술과 가치의 기준, 소비와 권위가 형성되는 방식을 탐구해온 작가다. 신작 〈Centre Pompidou Daiso〉는 퐁피두센터 소장 현대미술 대표작을 다이소 제품으로 치환하며 현대미술을 둘러싼 가치와 위계의 구조를 질문한다. 다양한 색상의 쓰레기봉투로 우고 론디노네의 조각을 치환한 〈Mountain〉, 택배 상자로 안토니 곰리의 인체 조각을 재구성한 〈Museum Dosi: CONCRETE〉 역시 원작의 기념비적 형태와 구조는 유지하되 재료를 현대 소비사회의 상징물이나 소비 후 잔여물로 대체해 현대미술의 가치 체계를 성찰하게 한다. 9월 5일(토) 오후 2시 오프닝에는 제프 쿤스의 대표작 〈Balloon Dog〉를 모티프로 한 참여형 라이브 퍼포먼스가 예정돼 있다.
▲ 도이(Doi, Minha Park), 〈잘자라 우리아가, Sing the baby a lullaby〉, 전구·모터·스테인리스, 250×92×230cm, 2025. ⓒ도이 작가 제공
도이(박민하)는 폐기된 전자기기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기능을 상실한 사물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탐구한다. 회로와 빛, 물질의 구조를 드러내며 효율 중심의 가치 체계에 질문을 던지고,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계가 맺는 새로운 관계를 제안한다.
▲ 이도소, 〈액자와 실리카겔〉, 장지에 채색, 130×324cm, 2026. ⓒ이도소 작가 제공
이도소는 시간, 기억, 망각, 존재의 불안정성을 물질과 조형, 공간의 관계로 탐색하며 붙잡으려는 시도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담아왔다. 한국화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실험적 시도의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병풍 '백납도'를 재해석한 6폭 병풍 〈구십구납도〉를 선보인다. 존재의 유한성 속에서 기억과 시간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붙잡고 증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본질적 노력과 고뇌를 담아낸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인출하기》 참여작가약력 ⓒHD LAB 제공
■ 아트페어 주간에 던지는 질문
이번 전시가 프리즈 서울·키아프 서울과 시기를 겹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품이 시장에서 선택되듯 사회 역시 기억과 가치, 노동과 감각을 끊임없이 선별한다는 이 전시의 문제의식은, 미술시장이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놓는 이 시기와 맞물려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전시는 하트원 공간 전체를 활용해 1층은 전시 및 홍보 공간, 4층은 주전시 공간으로 운영되며, 3층에서는 아티스트 토크와 도슨트 등 연계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는 사회와 미술계가 반복해 온 '선별'의 구조를 비판하기보다,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게 된 존재들을 다시 바라보는 데서 출발했다. 개방형 수장고인 하트원의 장소성과 프리즈 서울, 키아프 서울이 열리는 9월이라는 시기가 전시를 읽는 또 하나의 중요한 맥락이 되기를 기대한다."
- HD LAB
▲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인출하기》전시개요 . ⓒHD LAB 제공
관람료는 무료다.
■ 기자의 눈
하트원이라는 공간은 이번 전시의 배경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발언이다. 한때 돈을 맡기고 인출하던 자리에서, 지금은 기억과 감각이 같은 방식으로 오간다. 다섯 작가의 작업은 저마다 다른 재료와 언어를 쓰지만, 결국 같은 질문 앞에 선다 .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것들은 정말 사라진 것인가, 아니면 아직 열어보지 않은 상자 안에 남아 있는 것인가. 프리즈와 키아프의 화려한 부스들 사이에서, 이 조용한 을지로의 옛 금고는 오히려 더 또렷한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