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는 오래전부터 나이마다 이름이 있었다. 예순은 환갑(還甲), 일흔은 고희(古稀), 여든은 산수(傘壽), 아흔은 졸수(卒壽)라 불렀다. 그중 고희는 두보의 시구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왔다. 예로부터 일흔까지 사는 일이 드물었다는 뜻이다.
미술계에서 고희를 맞아 여는 전시는 나이를 기념하는 자리를 넘어선다. 한 작가가 오랜 시간 지속해온 화업을 되짚고, 그 시간 속에서 형성된 조형언어가 어디에 이르렀는지 살펴보는 자리이기도 하다.

서양화가 유승조가 올해 고희를 맞아 제33회 개인전을 연다. 전시는 9월 22일부터 30일까지 청주시 상당구 서문동 CGV 건물 1층 갤러리 원에서 열리며, 개막식은 22일 오후 4시다.
■ 물감을 긁어낸 자리, 결이 되다

개막을 앞두고 찾은 작가의 화실에서 유승조의 작품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색이었다. 넓게 펼쳐진 백색의 화면, 그 아래를 강하게 가로지르는 색면, 그리고 두 색 사이를 붙잡고 있는 듯한 가느다란 선.
그런데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색보다 먼저 보이는 것이 있다. 경계다.
어디까지가 한 색이고 어디에서부터 다른 색이 시작되는가. 분명하게 나뉜 색 사이의 가느다란 선은 화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작지만 전체의 긴장을 붙잡는다. 그는 색으로 경계를 말한다. 이는 작가가 작품에 제시한 해답이라기보다 작품 앞에 선 기자의 눈에 포착된 하나의 인상에 가깝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화면은 또 다른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에서 절제된 색면으로 보였던 표면에는 수많은 흔적과 물성이 존재한다. 물감을 올린 뒤 마르기 전에 긁어낸 자리, 겹쳐지고 밀려나고 다시 쌓인 흔적 속에서 화면은 단순한 색의 조합을 넘어 시간의 층위를 만들어낸다. 작가 역시 물감을 올리고 마르기 전에 긁어내는 작업을 자연의 숨결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그의 백색은 하나의 흰색으로 끝나지 않는다. 빛과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표면의 표정이 달라지고, 그 안에 축적된 시간까지 감지하게 한다.
여기에서 유승조의 작업을 읽는 중요한 단어 하나를 만난다. ‘결’이다.
결은 표면에 남은 흔적이면서 한 방향으로 축적되어온 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나무에는 나무의 결이 있고, 물에는 물결이 있다. 유승조의 화면에 축적된 결 역시 단순한 마티에르에 머물지 않는다. 반복된 행위와 시간이 화면 위에 남긴 기록이며, 자연을 바라보고 그것을 자신의 조형언어로 옮겨온 과정의 흔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결=海(Open Sea)〉, 〈결=野(Open Field)〉, 〈결=平和(Peace)〉와 〈바다이야기〉 등을 만날 수 있다.
■ 구상과 추상 사이, 섬

색면 작업에서 자연이 색과 선으로 압축되어 나타난다면 〈섬(An Island)〉 연작에서는 바다와 암석, 하늘이 보다 구체적인 풍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특히 최근의 〈섬〉 연작은 강렬한 분홍빛 하늘과 짙은 암석의 실루엣이 대비를 이룬다. 작가는 이를 실제 풍경의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자연이 지닌 정적과 변화하는 순간을 화면에 붙잡으려는 시도로 설명한다.
2026년에 제작된 40호와 50호 규모의 〈섬〉에서도 이러한 색채와 구도가 이어진다.
색면과 구상 풍경은 외형적으로는 다른 회화처럼 보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하나의 흐름 안에서 읽힌다. 자연의 모습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묘사하느냐보다 작가가 자연에서 무엇을 보고, 어떤 색과 흔적으로 남기는가에 무게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알아볼 수 있을 듯하다가 어느 순간 색과 면만 남는다. 반대로 추상적인 화면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수평선과 바다, 섬의 이미지가 다시 떠오른다.
구상과 추상, 색과 색, 바다와 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