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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전작 도록 발간 좌초 위기… 미술계 '공익'과 유족 '저작권' 정면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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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채색화 거장의 예술적 발자취 집대성 사업, 저작권료 이견으로 중단 출판·학술계 "미술사 정립 위한 공익 목적, 과도한 요율은 문화적 손실" 유족 측 "서점 유상 판매는 명백한 상업 행위, 창작자 권리 침해 불가" 저작권법 제35조의3 '공정 이용' 쟁점 부상… 제도적 중재 절실

2024 서울아트쇼 VIP 부스의 천경자 작품  (사진=한국미술신문)
2024 서울아트쇼 VIP 부스의 천경자 작품  (사진=한국미술신문)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채색화의 거장 고(故) 천경자 화백의 '전작 도록(Catalogue Raisonné)' 발간이 저작권료 산정을 둘러싼 갈등으로 중대 기로에 섰다. 작가의 평생 작업물을 집대성하여 한국 미술사의 뼈대를 세우려는 학술적이고 공익적인 시도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저작권 보호 원칙과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대규모 기획 전시와 심층적인 학술 연구를 앞두고 불거진 이번 사태는, 국내 미술계의 낡은 출판 관행과 저작권 보호 사이의 간극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번 사안의 중심에 있는 전작 도록은 단순한 화보집이 아니다. 한 작가가 평생에 걸쳐 남긴 모든 작품을 발굴하고, 시기별 매체별로 분류하여 출처와 전시 이력, 소장처 등을 상세히 기록하는 방대한 학술 서적이다. 미술 시장에서는 도록에 등재된 작품만을 진품으로 간주할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특히 천경자 화백은 생전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만큼, 그의 작품 전체를 체계적으로 고증하고 공인하는 전작 도록 제작은 학계와 화단은 물론 미술 시장 전체의 투명성 확보를 위한 오랜 숙원 사업이었다. 국공립 미술관과 학술 단체, 전문 출판 인력이 대거 투입되어 탄생 기념 시기에 맞춘 발간을 목표로 추진되었으나, 최종 도판 사용에 대한 저작권료 협상 단계에서 양측의 입장이 극명하게 엇갈리며 사업은 전면 중단된 상태다.

출판사 및 학술 단체 측은 이번 도록 제작이 거대한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상업 출판이 아니라는 점을 강력히 호소하고 있다. 수년에 걸쳐 수십 명의 전문 연구 인력이 투입되어 도판을 수집하고 진위를 고증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막대한 비용을 수반하는 적자 구조의 사업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 미술사의 귀중한 자산을 정립하는 공익적 성격의 출판물인 만큼, 저작권자 측에서 일반적인 상업 서적이나 아트 상품과 동일한 수준의 높은 저작권료 요율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과도한 저작권료 부담으로 인해 출판 자체가 무산된다면, 결과적으로 대중이 거장의 예술 세계를 온전히 접할 기회를 잃게 되는 심각한 문화적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다.

반면, 천경자 화백의 저작권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는 유족 및 저작권 대리인 측의 입장은 타협의 여지가 없이 단호하다. 아무리 학술적 가치가 높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사업이라 포장하더라도, 최종 결과물이 일반 서점을 통해 대중에게 유상으로 판매되는 이상 이는 명백한 상업적 성격을 띠는 제품이라는 지적이다. 창작자의 권리를 정당하게 인정하고 법률에 보장된 합당한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것만이 문화 예술 생태계를 발전시키는 올바른 기초라는 입장이다. 유족 측은 공익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작가의 고유한 유산인 저작권을 무상 혹은 헐값에 사용하도록 강요해 온 미술계의 오랜 관행 자체를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법조계와 저작권 전문가들은 이번 사안이 결국 저작권법 제35조의3에 명시된 '저작물의 공정 이용' 조항에 대한 해석 문제로 귀결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해당 조항은 통상적인 이용 방법과 충돌하지 않고 저작자의 정당한 이익을 부당하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보도, 비평, 교육, 연구 등을 위해 저작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일부 미술 학계에서는 영리 목적이 크지 않은 연구용 도록에 한해 이 조항을 폭넓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법조계의 시각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전작 도록의 특성상 작가의 거의 모든 작품 이미지가 고화질로 대량 수록되기 때문에, 책 자체가 원작의 시장 가치를 대체할 위험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소비자가 도록을 구매하는 것으로 만족해 실제 전시 관람이나 합법적인 아트 상품 소비를 줄인다면, 이는 저작권자의 경제적 이익을 실질적으로 침해한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 따라서 현행 법리상으로는 도록 전체가 작품 이미지 위주로 구성될 경우 저작권자의 명시적인 사전 허락과 정식 계약 체결이 필수적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다.

이러한 갈등의 여파는 미술계 전반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당장 2026년 하반기로 예정되었던 주요 기획 전시와 학술 심포지엄들이 도미노처럼 차질을 빚고 있다. 일부 기획사들은 저작권 협의가 불투명해지자 천 화백의 작품을 전시 명단에서 제외하거나 대체 작가를 섭외하는 고육지책을 마련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 근현대 채색화에 대한 대중의 접근성을 떨어뜨리고 관련 연구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미술계 전문가들은 이 사태가 단순한 비용 다툼으로 소모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해외 미술 선진국의 경우, 거장의 전작 도록을 제작할 때 국가 재단이나 대형 공익 기금이 선제적으로 개입해 저작권료를 중재하거나, 유족이 직접 독립적인 재단을 설립해 학술 사업을 주도함으로써 이러한 마찰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다.

결국 전작 도록이라는 공공 자산의 확충과 저작권 보호라는 두 가지 명제를 동시에 충족하기 위해서는, 정부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나 예술경영지원센터 등 공신력 있는 기관이 적극적인 중재자로 나서야 할 시점이다. 공익 목적의 출판에 적용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저작권료 가이드라인을 새롭게 제정하거나, 학술 가치가 입증된 프로젝트에 한해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저작권료의 간극을 보전해 주는 등 실효성 있는 제도적 보완책 마련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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