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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색을 쌓아 삶을 말하다 - 《Life Story》박해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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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8일까지, 평창동 아트센터자인에서 개인전 개최

종로구 평창동에 위치한 아트센터자인에서는 현재 박해수 작가의 개인전 《Life Story》가 한창이다. 그곳에서 작품을 통해 역사성을 쌓아올리는 1백 겹의 화가 박해수를 만났다. 

제공. 아트센터자인
제공. 아트센터자인

"이거 다 물감이에요. 영국에서 온 박사도 이게 물감이라니까 놀라더군요." 캔버스의 표면을 따라 두껍게 솟은 무늬는 조각도, 스티로폼도 아닌 100% 물감이었다. 박해수 작가는 붓대신 칼날을 활용하여 마치 자수로 한 땀 한 땀을 새기듯 물감을 찍어내는 독자적인 기법으로 100호가 훌쩍 넘는 캔버스에 일 백여 겹이 넘는 물감을 쌓아올리며 그 만의 고집스러운 가치를 완성하고 있었다. 한 겹, 한 겹 쌓고 또 쌓아 올린 두께는 시간과 노동, 그리고 작가의 버티는 힘 그 자체다. 박해수 작가는 작품의 모든 과정에 자신의 '고통'을 기입한다고 말한다. 

박해수(2009), Stone Knife_Acrylic on Canvas_90x194cm (제공.아트센터자인)
박해수(2009), Stone Knife_Acrylic on Canvas_90x194cm (제공.아트센터자인)

돌칼은 인류의 첫 생존 도구...나도 21세기 화가로서 같은 고통을 새긴다.

“우리 인류가 아무것도 없을 때, 배고픔을 해결하려고 가장 먼저 만든 게 돌칼이에요. 맹수의 이빨을 본떠 만든 생존의 무기죠. 인류는 그것으로 짐승을 잡고, 나누고, 살아남고 결국 지금의 문명까지 왔습니다.”

“그래, 너희 원시인들이 고통으로 살았다면, 나도 21세기 화가로서의 고통으로 쌓아올려 보자. 끌칼로 100겹을 찍고 또 올리면서 내 생존을 그리는 거죠.”

박해수 작가는 원형적 '생존'을 자신의 창작 과정의 원동력이자, 역사의 전승으로서 작품의 의미로 담아내고 있었다. 작가의 <Stone Knife>작품은 멀리서 보면 돌칼의 윤곽이 선명해보이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배경과 합쳐지며 희미해진다. 작가는 작품의 질감과 색이 배경에 스며들 듯 혹은 사라질 듯 표현한 이유도 들려준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길이 안 보여요. 멀리서 봐야 윤곽이 보이죠. 그래서 작품도 가까이서는 잘 안 보이게, 멀리서 보면 길이 드러나게 만들었어요. 삶도 똑같습니다.”

제공. 아트센터자인
제공. 아트센터자인

아시아인의 끈기와 '도(道)'를 담은 해바라기

이어 등장한 해바라기 작품은 고흐의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르는 소재다. 하지만 박해수 작가는 “아시아인의 방식으로 해바라기를 재해석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고흐만의 꽃이 아니거든요. 전 세계에 있는 꽃인데, 고흐 때문에 그 이미지가 고정돼 버린 거죠. 아시아인의 인내·끈기·수행하는 마음으로 해바라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육안으로 보기에는 단단한 표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수백 겹의 점과 선이 쌓여 있다. 작품 하나에만 무려 6개월, 작은 점(‘머리카락’이라 부르는)들이 250개 이상 겹쳐 있다.

“내 기법을 보고 따라 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근데 다 포기하더라고요. 10겹만 쌓아도 힘드니까. 100겹을 쌓는 고통은 해본 사람만 압니다.”

제공. 아트센터자인
제공. 아트센터자인

다른 색이 뭉쳐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삶의 이야기

박해수 작가의 전시 타이틀은 《Life Story》이다. 보색인 빨강과 파랑을 소재로 작가는 '대립'이 아닌 '융합'을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흔히 빨강·파랑을 정치적 대립처럼 보지만, 사실은 서로가 너무 강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청실·홍실처럼 각자의 다름이 모여 하나의 삶이 된다는 의미로 표현했습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로드(Road)>는 총 16개의 패널이 하나의 길을 만든다. 천장 높이에 따라 조합을 달리하며, 전시장마다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변한다.

“삶은 여러 조각이 연결된 하나의 길이에요. 그래서 이 작품은 어떤 전시장에서도 자기 길을 만들어냅니다.”

박해수, Pray for_Acrylic on Canvas_60x60cm (제공. 아트센터자인)
박해수, Pray for_Acrylic on Canvas_60x60cm (제공. 아트센터자인)

기도는 정성이 필요하다

인터뷰 말미, 작가는 ‘기원(祈願)’을 주제로 한 작업도 소개했다.

“부모님, 사랑하는 사람, 자신에게 기도하는 사람들 모두 마음을 담을 대상이 필요해요. 아무것도 없는 공간보다, 귀가 있고 형태가 있는 데 앞에서 비는 게 더 간절해지지 않겠어요? 그래서 정성을 형태로 구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업들은 단숨에 만들어지지 못하는 만큼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가있다보니, 누군가의 기도에 내가 쏟은 정성이 닿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요.”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시절, 꿈에서 색이 비처럼 쏟아졌다

작가의 기법은 ‘고통의 층’을 쌓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그 시작을 묻자, 그는 조용히 과거를 꺼냈다.

“저는 원래 입시 미술 학원 원장이었어요. 아이들 미대 보내던 선생이었죠. 근데 삶이 잘 안 풀리면서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졌습니다. 공사장 일도 하고, 잡일도 하고… 죽고 싶단 말이 진짜 입 밖으로 나올 만큼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박해수 작가는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꾸었다.

“비가 툭툭 떨어지는데, 색이 섞였다 사라졌다 반복하는 이상한 비였어요. 갑자기 사과가 나타나고, 그 사과의 색들이 뒤엉키는데, 심장이 따끔거릴 정도로 강렬했죠. 밤새도록 색이 겹쳤다 사라졌다가 또 쌓이고… 아침에 일어나서 ‘내가 본 꿈을 어떻게든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색을 ‘찍고 쌓는’ 기법을 시작했다. 말 그대로, 고통이 쌓여 형태가 되고, 시간이 쌓여 생명이 되는 작업이었다.

제공. 아트센터자인
제공. 아트센터자인

박해수 작가의 이야기는 결국 하나의 메시지로 모아진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혼란스럽지만, 멀리서 보면 길이 된다. 그 길을 인내로 쌓아 올리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다. 그의 작품이 거대한 격자와 깊은 두께, 그리고 수백 겹의 반복된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고통의 층을 하나씩 쌓아 자기만의 언어를 만든 화가.

2025년, 박해수라는 이름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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