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 벨(Hugo Bel)은 프랑스 조형 예술가로 인시튜(In situ)설치 작업을 주로 한다. 그가 생각하는 장소 특정적 작업이란 장소의 역사성, 장소만의 감각적인 것,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작품이다. 위고 벨이 처음부터 인시튜 설치 작업을 한 건 아니다. 툴루즈 미술 대학 재학 시절 주 전공은 회화였다. 하지만 회화에 대해 탐구할수록, 회화의 틀(frame) 때문에 회화 작품과 전시 공간 사이에 간격이 생긴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회화의 틀을 부수어 다양한 층위를 지닌 평면을 만들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석고를 캔버스 위에 부어 본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천천히 캔버스를 세웠더니 종이 형태로 굳어버린 얇은 종이 형태의 석고가 떨어져 나왔다. 위고 벨이 보기에 이 석고 종이는 공간에서 자신의 운동과 재료의 상호 작용이 만들어 낸, 그래서 장소의 역사를 담고있는 재료 자체 진화의 산물이었다. 그때부터 위고 벨은 시간을 담아낼 수 있는 인시튜 작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많은 인시튜 작품이 공간과의 조화를 염두에 두며, 따라서 장소 특정적 작업을 의미하지만, 위고벨에게 인시튜는 무엇보다 시간을 담는 작업이다. 그에게 장소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역사가 담긴 곳이기 때문이다. 특정 장소에 작업 설치 요청을 받으면 그 장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장소의 역사에 대해 배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역사의 의미를 토대로 장소 특정적 설치작품을 한 후, 작품을 가만히 놔두는 식으로 작업은 진행된다.
" 재료를 믿고 가만히 놔두면 주변의 환경과 반응하면서 장소를 드러냅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체험했던 걸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물질도 자신만의 역사, 즉 환경과 상호 반응하면서 변해 온 과정을 자신 안에 간직한다고 생각해요."
사실 위고 벨이 생각하기에 작업에서 쓰이는 재료는 두 가지 의미의 시간성, 즉 기억을 지닌다. 우선 인간과 관련된 기억, 역사이다. 예컨대 그가 주로 쓰는 재료인 설탕을 보면, 설탕이라는 재료에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노예제도와 관련된 역사나 신체에 미치는 악영향(충치, 당뇨 등)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재료는 현상학적인 의미의 역사성 혹은 기억을 지닌다. 다른 한편, 재료를 스스로 진화하게 놔둠으로써 위고 벨은 재료 자체가 스스로를 전개하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재료가 가진 현상학적 의미의 역사성에 장소성을 덧붙이면서 위고 벨은 작업의 전개과정 자체를 전시한다. 그래서 위고 벨에게 인시튜 작업은 역사 기록학(historiography)이다. 역사적인 장소에 놓인 재료가 자신만의 역사를 전개하며 스스로 형태를 변화시켜 가는 것이 곧 작품의 전개 과정이다. 그래서 그의 인시튜는 시간 혹은 기억을 모티프로 삼는다.
위고 벨이 작업에 담는 시간은 베르그손적인 기억이며 따라서 예상치 못한, 예측이 불가능한 형태(forme), 놀랄만한 결과물이 작업에 나타나기도 한다. ‘La banquette et le travail du temps’(의자와 시간의 작용)이 그런 경우이다. 이 작업을 위해 위고 벨은 설탕으로 인간 형상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감에 따라 인간 형상이 점차 까맣게 되었으며, 형상 주변의 석고로 만든 것들도 설탕으로 만든 형상이 변함에 따라 훼손되었다. 이런 사고(accident)를 위고 벨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순전히 재료만의 고유한 현상이고, 여러 물질이 만나서 만들어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었어요. 설탕이 녹으면서 석고에 영향을 미쳤죠. 마치 설탕과 석고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물질인 것처럼요. 이 작업은 물질이 저에게 준 일종의 선물이었습니다."
인시튜 작업 전에 위고 벨이 아틀리에에서 하는 조형 탐구는 물질(재료)을 극한까지 밀어 부치는 실험이다. 아틀리에에서 재료끼리 직접 섞어보고 거기서 나타나는 사고, 변형을 관찰한 후, 괜찮은 형태가 나타나면 이 실험의 결과를 설치 작업을 할 때 적용하는 식이다. 적용하기 전에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설치 결과를 예측하기도 한다. 그래서 위고 벨은 스스로를 아티스트라기보다 연구원이라고 생각한다. 즉, 인시튜 작업에서 그가 설치하는 건 실험, 탐구를 응용한 조형 작업이며 여기에는 위고 벨의 행위와 작업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요컨대 위고 벨이 설치하는 건 일종의 ‘제어된 환경’(controlled envrionnment)이며, 이후부터는 설치 작품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 시간을 전개한다. 어떻게 보면 예상한 것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의 놀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죠. ‘예술 작품이란 간섭과 놔둠의 놀이이다.’ 모든 걸 제어하면 작업이 너무 진부해집니다. 예술 작품이란 ‘놔둠’(lâcher-prise)으로써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놔둠과 제어의 놀이는 작업을 해체하는 중에도 나타난다. 2019년에 파리 오-파베 갤러리(Galerie du Haut-Pavé)에서 했던 설치 작업 ‘Stalker’(스토커)의 경우가 그렇다. 이 작업은 설탕과 톱밥을 사용해서 만든 침대형상으로, 옮길 수도 없고 보관도 불가능 하기에 전시 후에 해체를 해서 버려야만 했다. 하지만 해체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가 나왔고 이 형태들도 전시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위고 벨은 해체 중 나온 형태를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기억, 시간이 작업의 모티프이지만, 그렇다고 감각적인 것, 즉 아름다운 형태를 놓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Promenons-nous dans les bois’(숲을 거닐어봐요) 작업을 할 때는 관객이 가질 시각, 청각(숲 소리), 후각(숲의 냄새)을 고려했다. 이렇듯 그의 인시튜 작업은 환경과의 미적인 조화도 염두에 둔다. 많은 현대 미술 아티스트들이 아름다움과 예술을 구분하려고 했다면 위고 벨은 끝까지 아름다움(aesthetic)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 때문에 미대 재학 시절부터 지금까지도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감각적인 것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강조한다.
"제 작업을 이끄는 건 여러 가지 철학 개념들입니다. 그렇다고 결과물, 눈에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작업 구상, 작업의 진행 단계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발견이라는 것도 미적인 것, 감각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Paysages mentaux’(정신적 풍경), ‘Paysages scéniques’(연극적 풍경)과 같은 심리적인 공간을 표현한 작업도 결국에는 시각적으로 표현되며 관객은 개념을 마주하기 전, 감각 기관을 통해 특정 공간에 놓인 설치 작업을 만난다. 위고 벨이 생각하는 미적 경험이란 물론 개념적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순수하게 감각적인 몰입의 경험도 아니다. 감각적인 경험과 개념의 분석이 서로 만나 생겨나는 경험이 그가 생각하는 미적 경험이다. 그리고 시간, 기억은 이런 변증법적 미적 경험 안에서 체험된다.
영원한 것은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재료를 있는 그대로 ‘놔둔다’는 생각에 영감을 주었다. 엄밀히 말하면 위고 벨의 작업을 가로지르는 가장 큰 주제는 ‘무상’(impermanence)이다. ‘무상’은 현대 미술에서 자주 쓰는 형용사인 ‘일시적임’(ephemeral)과도 다르다. ‘일시적임’에는 시간이 순환한다는 의미는 없는 반면 불교의 ‘무상’은 영속적인 순환의 의미가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즉, 생성이란 곧 순환하는 생성이라는 것이 ‘무상’의 의미이다. 그가 설탕과 석고를 주재료로 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설탕과 석고, 두 재료 모두 다양한 형태, 예를 들면 가루일 수도 있고, 끈적거리는 액체일 수도 있고, 다시 굳어서 딱딱한 형태가 될 수도 있어서 ‘무상’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좋은 재료이다. 게다가 ‘인시튜’라는 작업 방식 자체도 ‘무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위고 벨은 생각한다.
"‘인시튜’는 결국 지금, 여기, 즉 이 순간을 완연히 느끼는 것이며 이것이 불교의 명상이 추구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인시튜’ 작업 방식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을 표현하는 방법인 거죠."
무상함을 표현하면서 위고 벨은 현대 사회에도 비판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가 보기에 현대 사회는 삶의 ‘무상함’을 애써 외면하려 하기 때문이다. 신체가 늙고 병들고 하는 것도 무상함 때문인 데 반해, 현대인은 신체의 무상함을 애써 부정하고 영원한 젊음을 꿈꾼다.
"항상 젊은 모습대로 살고 싶어 하면서 무상함을 거역하고 영원함을 꿈꾸는 것 같아요. ‘무상함’, 이게 바로 우리 모두가 놓치고 있는 겁니다. 참 아이러니해요.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체인데, 생명체이길 거부하는 것 같아요."
위고 벨이 변화무쌍한 재료로 사람의 형상을 자주 만드는 데는 무상함을 둘러싼 이런 비판적인 이유가 있다. 지오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저서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조에(Zoé, 생물학적 삶)와 비오스(Bios, 정치적인 삶)를 설명한 적이 있다. 위고 벨은 설탕으로 신체를 만들면서 인간을 정치적인 삶에서 빼내어 순전히 생물학적으로 살게 하려 한다.
위고 벨에게 모든 건 무상하지만, 그렇다고 영원한 진리가 없는 건 아니다. 20세기 초 역사학자인 아비 바비부르크(Aby Warburg)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 인류의 모든 무의식적인 이미지, 즉 집단 무의식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지금까지 가져왔던, 그리고 앞으로도 가질 수 있는 모든 무의식적인 이미지가 집단 무의식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일종의 보편적 인간성(Humanity)인 셈이다. 위고 벨은 좋은 예술 작품이란 이런 집단적 무의식으로 향하는 ‘이미지-다리’이다. 다시 말하면 예술이 만들어내는 형태는 국적, 시대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존재에 다가서기 위한 보편적 언어이자 ‘이미지-다리’이다.
"제가 만드는 형태가 집단 무의식으로 향하는 ‘이미지-다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있고요."
‘이미지-다리’를 만들면서 관객이 집단적 무의식, 보편적 인간성에 다가가게 한다는 것은 관객 스스로 자신만의 ‘이미지-다리’같은 무언가를 가지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면 창작의 힘이 관객에게도 전달되어 관객 자신도 창작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집단 무의식이라는 건 이미지(image) 자체가 아닌 바비부르크가 말하는 ‘잔존 이미지’, 즉 이미지를 둘러싼 어떤 창작의 에너지, 소위 말하는 일차적인 힘이 아닐까 ?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영속하는 건 결국 창작의 힘이 아닐까 ?
"당신이라는 사람 모습 그대로 창작하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창작하면서 사랑을 하지 전쟁을 하지는 않아요."
결국 위고 벨이 강조하는 것도 창작의 힘, 즉 상상력이다. 지금, 여기를 완연히 관조하기 위해선 ‘이미지-다리’ 같은 예술 작품이 필요하며 작품은 이미지를 통해 관객을 상상력으로 이끈다. 이젠 관객 스스로가 창작자가 되어 상상력을 발휘해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이게 바로 상상력의 힘이다. 상상력은 옮겨 붙는 불처럼 아티스트로부터 작품을 거쳐 관객에게로 확산되며 관객을 거쳐 다른 관객에게로, 미래의 아티스트에게로 옮겨붙는다. 결국 시간만 순환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무상하지만 상상력은 순환하며 계속 반복된다. 들뢰즈의 말대로 예술 작품은 차이를 반복하게 하는 윤활제인 것이다. 그리고 상상력은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사이의 조화를 끌어낸다. 상상력이라는 것 자체가 보편적 인간성을 이해하는 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위고 벨의 인시튜 작업은 미학적 윤리학(aesthetic ethic) 작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