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부터 열린 서울아트센터 도암갤러리에서 박현호 작가의 개인전 <불타오르는 살갗>.
지난 기사에 이어 박현호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심도있게 듣고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Q. 안녕하세요, 작가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박현호이고요. 현재 그림을 그리고 있고, 이전에는 미디어 설치작업을 했었습니다. ‘기억과 감정의 시각적 탐구자’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감정에 대한 기억을 붓질과 물감이라는 매체를 통해 물리적으로 붙잡고, 이를 내어놓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Q. 작품의 주제가 기억과 감정의 탐구인 이유를 알 것 같은데요. 그 계기가 궁금합니다.
: 5년 전쯤 'Creamy Catastrophe'라는 개인전을 열면서, 트라우마 기억을 회복하기 위한 그림 시리즈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기억과 감정을 주 테마로 삼았죠.
2018년에 개인적으로 겪은 트라우마를 회복하기 위해 미술치료의 일환으로 작업을 시작했고,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논문 주제와 연구 주제로 트라우마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왜 그동안 트라우마를 마주하기 어려웠는지 알게 되었어요. 보통 사람은 특정 사건과 가까운 기억을 마주하는 것이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시간이 지나고 일정한 단계를 거치고 난 뒤 본인의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되고, 그것을 꺼내 놓고 일상적인 기억으로 변모시킨다고 하던데, 실제로 제가 경험해 보니 그 말이 맞더라고요.
Q. 트라우마를 작품으로 승화하신 과정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 치료를 받던 시기에 그렸던 드로잉들이 시작이었어요. 그림이라는 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생각을 한 번에 압축해서 표현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간단히 그린 그림인데도 그 당시의 기억이 잘 살아 있어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고,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도 애매한 감정들을 나를 위해서만 그렸죠. 나만 해석할 수 있는 그런 그림들이에요. 처음에는 정말 어려웠어요. 처음 1~2년 동안은 아주 힘들었고,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 과정 중에 저는 대학원에 들어갔고, 그림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대학원 시절 그림에서는 제 그림에 구체적인 사건이 드러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직도 그 부분을 어려워하고 있구나 생각했죠. 시간이 지나면서 트라우마가 회복되고, 더 나은 단계로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어요. 그래서 인상과 기억, 살갗에 대한 그림으로 지금까지 작품 활동으로 이어오고 있습니다.
Q. 캔버스가 아닌 가죽에 그림을 그리시는 점이 인상적인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 캔버스는 시간이 지나면서 유화의 기름을 빨아들입니다. 기름이 스며들어 결국 안료만 남게 되죠. 그러나 제가 쓰는 인공 가죽은 캔버스나 동물 가죽보다 숨을 쉬지 않습니다. 인공 가죽의 표면에 유화를 그리는 순간, 이것이다 싶었어요. 가죽은 기름을 흡수하지 않고 표면에 머물러 있게 합니다. 또 유화는 마르는 성질이 수채화와 달라서, 시간이 지나면서 기름이 산소를 만나 경화되죠. 캔버스는 기름을 빨아들여 더 꺼지지만, 가죽은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물감이 표면에 떠 있는 상태로 남아, 표면과 합쳐지지 않습니다.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기억의 작용은 ‘표피적’입니다. 인식의 표피에 떠서 생생하게 굳어가죠. 기억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인상’단계로 잠깐 머물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잊혔다가 떠오르고, 망각과 재분출을 반복하면서 기억이 된다고 생각해요. 또 기억이 뇌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피부의 표면이나 몸으로도 기억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상이 기억이 되는 과정에 몸의 표면인 ‘살갗’이 필수적으로 표현되고 있죠. 이러한 기억이 표면으로 표출되는 것이 저에게는 그림입니다. 이러한 기억과 표출, 인상의 관계를 표현할 때, 캔버스보다는 가죽이 더 적절하다고 느꼈습니다. 가죽 위의 물감들은 우리의 기억처럼 부유하는 것이죠.
Q. 가죽과 마찬가지로 유화를 사용하시는 특별한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 저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한참 동안 망설이고 고민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마르는 속도가 느리고 한 번 정해 놓으면 잘 변하지 않는 유화의 특성이 마음에 듭니다. 이게 유화를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아크릴은 그림을 그리면 바로 말라서 드라이해지고 수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유화와 많이 다르죠.
또한, 저는 어떤 이미지를 보고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경험한 것을 떠올리며 그리기 때문에 묘사에 한계가 있습니다. 뭔가 기억은 또렷하지 않고, 망각과 떠오름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경계가 좀 더 분명한 이미지도 있지만, 흐릿하거나 부유하는 이미지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망각과 부유하는 것을 생각합니다.
이러한 표현을 위한 터치를 남기기 위해서는 스케치 라인대로만 그려서는 안 됩니다. 우연성이 더 자연스러운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통제 밖의 상황을 만드는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물감이 표면에 묻어나도록 유도하는 방법이 더 적합하다고 느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