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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슐만 : ‘어나니머스 프로젝트’로 사랑을 전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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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onymous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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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니머스 프로젝트 스튜디오에서 리 슐만. 이소이 기자. 
어나니머스 프로젝트 스튜디오에서 리 슐만. 이소이 기자. 

“컬렉터, 사진작가, 영화감독, 큐레이터… 저를 뭐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중 하나에 저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아요. 저는 그냥 리 슐만(Lee Shulman)이에요.”

리 슐만은 컬렉터이자, 사진작가이며, 영화감독이며 동시에 큐레이터이고 싶어 한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많은 규정들 사이의 어딘가, 그 경계에 있고자 한다. 규정들의 ‘사이’라는 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사이’만큼 리 슐만의 예술적 지향을 잘 나타내는 것은 없다.

197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리 슐만은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학에서 사진과 영화를 전공한 후, 광고를 비롯한 영상 제작을 하는 감독으로 일을 시작했다. 20년 전인 2004년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옮긴 그는, 2017년부터 ‘어나니머스 프로젝트(The Anonymous Project)’를 시작하면서 아티스트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The Anonymous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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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그러나 우리 모두의 기억을 전시하다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우연히 나왔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코다크롬(빈티지 슬라이드)을 리 슐만에게 주었던 것이 시작이다. 아버지가 준 슬라이드를 본 리 슐만은 호기심에 인터넷으로 다른 사람들이 파는 빈티지 슬라이드를 구매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자신이 모은 슬라이드의 사진들을 전시하기로 결심했다. 주로 3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의 사진들이다.

“슬라이드에는 주로 가족사진이 찍혀있어요. 특히 생일이나 파티 같은 순간들이 찍혀있죠. 사진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사진에 찍힌 순간은 우리 모두 다 경험했던 순간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택하고 전시하는 사진에는 모두의 기억, 즉 공동 기억(collective memory)이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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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슐만의 생각하는 공동의 기억은 전쟁, 혁명 같은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소소한 삶의 추억,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추억이다. 따라서 사진에서 보는 모르는 얼굴은 우리 자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2020년대를 살고 있는 지금, 옛 사진을 보면서 감동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진에 찍한 사람들은 당시 방식대로 옷을 입고,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한 미국 사람임에도 저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2023년을 살고 있는 젊은 층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었다. 리 슐만은 2023년 서울 그라운드시소 서촌에서 열린 ‘어나니머스 프로젝트' 전시를 기획하면서 설레는 동시에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제가 서울에서 전시하려고 했던 사진들은 대부분 미국 사람의 사진이었어요. 그것도 한참 옛날 사진들이었죠. 미국과 정반대에 있는 나라에서 현대를 살고 있는 관객들이 어떻게 반응할 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어요. 사실, 두려웠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너무 달랐습니다. 많은 한국분이 전시에 감동하는 게 보였어요. 어떤 분은 울기까지 했습니다. 저도 그걸 보고… 너무도 감동받아서 전시장 구석에서 혼자 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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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서 드러나는 것은 얼굴 자체가 아니라, 얼굴이 드러내는 관계이다. 리 슐만이 전시하는 사진에는 사진작가와 피사체의 차가운 관계가 아니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 ‘할머니와 손녀의 관계', 즉 ‘사랑'이라는 관계가 담겨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단순히 인물을 기록하는 게 아니라, ‘널 사랑해'(I love you)라고 말하는 것이다. 때로는 익명의 아마추어 사진작가도 프로 사진작가 못지않게, 아니 프로보다 ‘사랑'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리 슐만이 이름도 모르는 아마추어가 찍은 빈티지 슬라이드를 모으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는 사람들은 ‘사랑의 추억'을 보고 자신이 가졌던 ‘사랑의 기억'을 소환한다. 엄밀히 말하면 ‘추억'이란 다른 누군가와 함께 한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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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 뭐냐고 물어본 적 있나요? 물어보면 십중팔구 자기 혼자 있던 순간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했던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추억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는 기억이에요.”

리 슐만에게 사진이라는 메디움은 추억이며, 그렇기에 관계이다. 그래서 공동 기억이다. 삶의 파편은 언제나 관계로 가득 차 있기에, 사진은 삶을 반영하고, 삶에 대해 가르쳐준다.

“저는 항상 사진에서 보이는 삶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삶은 아름답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것은 저에 대한, 그리고 관객을 위한 일종의 치유(therapy)이기도 합니다.”

 

‘전시'가 곧 작품이다.

아티스트로서의 리 슐만의 활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작가로서의 아티스트가 하는 일보다는 큐레이터의 활동과 가깝다. ‘어나니머스 프로젝트'가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팬층이 생겨났고, 팬들이 가지고 있던 빈티지 슬라이드를 보내주는 경우가 많아졌다. 리 슐만은 스튜디오로 배달 온 소포를 뜯고, 슬라이드를 하나하나 자세히 본 후 전시에 쓸 사진들을 골라낸다.

리 슐만은 슬라이드를 자세히 본 후, 전시할 사진을 골라낸다. 이소이 기자
리 슐만은 슬라이드를 자세히 본 후, 전시할 사진을 골라낸다. 이소이 기자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슬라이드는 한 백만 개 정도 됩니다. 그 중 전시하려고 선택한 건 2만 5천 개 정도뿐이에요. 나름 엄격한 과정을 거쳐 선택합니다.”

선택의 기준은 하나이다. 사진을 찍은 사람과 찍힌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잘 보여야 한다. 사진을 선택한 후, 전시할 때는 두 번째 큐레이팅을 한다. 영화에서 쓰이는 ‘미장센'이 바로 이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영상 감독으로서의 경험이 여기에서 빛을 낸다.

“영화에서 장면(신, scene)을 다 촬영한 후 감독이 몽타주(montage, 편집)를 하듯이, 저도 사진을 선택한 후 일종의 몽타주를 합니다. 영어로는 영화감독을 필름메이커 (filmemaker)라고 하는데, 프랑스어로는 영화감독을 리얼라이저(réalisateur)라고 해요. 리얼라이저는 무언가를 현실로 만드는 사람이라는 뜻이라서 전 영어 단어보다 프랑스 단어를 더 좋아합니다. 작품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거든요.”

큐레이터로서 리 슐만이 하는 미장센은 영화감독의 미장센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토리보드를 그리고, 사진이 놓일 장소의 장식까지 미리 생각한다. 전시에서 미장센의 목표는 하나이다. ‘관객'을 최대한 몰입하게 하고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리 슐만은 사진을 단순하게 전시하지 않고, 사진을 전시하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다. 예를 들면, 2019년 아를 사진전 ‘The House’에서 리 슐만은 직접 부엌, 거실을 꾸며, 각 공간에 맞는 사진을 전시했다. 각 전시 공간이 가진 특색이 다 다른 만큼, 리 슐만의 전시는 공간에 따라 달라지며, 그래서 같은 전시가 두 번 있을 수 없다. 일종의 인-시튜(In situ) 작업인 셈이다. “저에게 작품이란 ‘전시' 그 자체입니다.”라고 리 슐만은 강조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공간 작업이기도 하다.

영화감독이 관객의 반응에 예민한 만큼, 리 슐만도 관객의 태도에 예민하다. 관객을 생각하지 않고 만든 영화는 성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전시에서도 관객의 자리는 중요하다. 리 슐만은 관객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사진만 벽에 걸어 놓는 전시에 비판적이다. 그런 전시는 너무 차갑고,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상적인 전시란 모든 관객이 이해할 수 있고, 전시 공간에 몰입할 수 있는 전시, 그래서 사람들이 이미지 속, 감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전시이다. 즉, 그가 말하는 ‘몰입'은 단지 유희에 그치는 놀이가 아니라, 관객이 순간적으로 감정 속에서, 이미지 속에서 자신을 잃는 경험, 소위 말하는 미적 경험(aesthetic experience)을 위한 몰입이다.

“관객을 직접 감동시키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술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몰입 너머…

전시에 삶의 메시지를 담고, 모든 사람이 몰입 속에서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고 해서, 리 슐만의 작업이 예술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론적인 문제를 외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마틴 파 (Martin Parr)와의 협업은 리 슐만이 예술로서의 ‘사진'이라는 장르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나니머스 프로젝트’와 마틴 파는 각자 소유한 사진 중 서로 비슷한 장면을 찍은 사진을 모아서 책(Martin Parr & Anonymous Project : Déjà view, Textuel 출판사, 2021)으로 만들었는데, 책 왼쪽 페이지에는 리 슐만이 선별한 사진을, 오른쪽 페이지에는 마틴 파가 찍은 사진을 두었다. 이런 식으로 책을 편찬하면서, 두 아티스트는 독자에게 “무엇이 좋은 사진을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책은 익명의 사람이 찍은 사진도 마틴 파라는 위대한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만큼이나 좋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바탕으로 2022년에 파리 매그넘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 ‘Déjà View’ 에서는 벽 위에 마틴 파의 유명한 문구 “아무나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사진을 선택하는 건 사진작가이다.(Tout le monde peut prendre des photos, mais faire un choix, c’est cela qui fait un photographe)’를 써 놓기도 했다.

'Martin Parr & Anonymous Project : Déjà view' 책 커버
'Martin Parr & Anonymous Project : Déjà view' 책 커버

2023년에는 세네갈 사진작가 오마르 빅토르 디오프(Omar Victor Diop)와 함께 50-60년대 미국 분리주의 정책을 주제로 한 ‘Being there’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작업은 ‘어나니머스 프로젝트’가 소유한 사진들 중, 50-60년대를 배경으로 백인들만 찍힌 사진 속에 흑인인 디오프의 사진을 합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사진은 50-60년대의 미국 분리주의 정책에 대해 익살스럽게 묘사한다. 작업은 전시로 이어졌으며, 이후 책으로도 출간되었다.(Being There, Textuel 출판사, 2023)

Being There 47 | 2023 | Image : 30 x 42,5 cm - Framed : 50 x 50 cm | © Omar Victor Diop & Lee Shulman, The Anonymous Project / Courtesy Galeries BINOME & MAGNIN-A, Paris
Being There 47 | 2023 | Image : 30 x 42,5 cm - Framed : 50 x 50 cm | © Omar Victor Diop & Lee Shulman, The Anonymous Project / Courtesy Galeries BINOME & MAGNIN-A, Paris

이 두 작업에서 돋보이는 건 리 슐만이라는 아티스트는 단순히 관객을 이미지 속으로 몰입시킬 뿐 아니라, 관객들이 스스로 ‘예술로서의 사진'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하며, 때로는 예술 바깥의 영역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리 슐만의 작품은 현대적이다.

“저는 사진과 현대 미술, 그 사이에 있습니다.”

‘어나니머스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5월에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부산에서 전시할 예정(날짜, 장소 미정)이며, 지금은 파리의 산마리텐 백화점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산마리텐 백화점의 프로젝트는 파리와 베니스에 ‘어나니머스 프로젝트'를 전시하며, 이 두 도시를 상징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파리에서는 산마리텐 백화점에서 2월 7일부터 전시가 시작되며, 베니스에서는 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5월부터 리알토 다리에 있는 폰타코 데이 데테시(Fondaco Dei Tedeschi, 날짜 미정)에서 전시가 시작될 예정이다. 이후의 프로젝트를 묻자, 프로젝트가 몇 개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제 이름으로도 프로젝트를 할까해요. 새롭게 도전하는 거죠.”

리 슐만은 마틴 파를 자기 영웅, 모델로 삼고 있다. 마틴 파는 끊임없이 틀을 부수며 새롭게 도전하기 때문이다. 마틴 파처럼 리 슐만도 계속 도전할 것이며, 어떤 식으로 도전할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의 도전은 언제나 예술적 가치를 가질 것이다. 리 슐만의 작업은 도전의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사실과 시도의 결과 그 '사이'에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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