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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KL&Julie(케이엘 앤 줄리) 작가와 작은 대화

구글 선호 매체로 추가
섬-징검다리_조합토, 유약_2008
섬-징검다리_조합토, 유약_2008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제주 산지등대, 일명 ‘공간 물결(SPACE_WAVES)’에서 6월 1일부터 30일까지 정소진, 백승주, 남영인 그리고 KL&Julie 4인 전 ‘길을 잃다-작은 숨을 쉬다’를 열었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긴 시간 고향을 떠나있었던 작가 KL&Julie(케이엘 앤 줄리)에게 제주는 UFO, 여전히 미확인된 그 무엇이라 한다. 이제는 제주 사람도 서울 사람도 아니어서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고 한다. 오랜 시간 작업을 중단했던 작가는 기존의 재료와 매체를 놓고 캔버스와 물감을 집어들었다. 그의 작업은 사적 기억과 제주의 풍경,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모티브가 뒤얽혀있다. 

이 인터뷰는 한국미술신문이 만난 제주 공간 물결 SPACE_WAVES에서의 전시 <길을 잃다 작은 숨을 쉬다>참여 작가 KL&Julie과의 대화를 정리한것이다. <편집자 주>

 

Q. 제주에 위치한 공간 물결 SPACE_WAVES (산지등대 복합문화공간)에서 가졌던 전시에서 보여준 작업이 흥미로웠다. 드로잉, 페인팅, 입체(오브제) 그리고 영상작업까지  영역이 다양하지만 주요매체는 회화로 보인다. 이전에는 어떤 작업을 했는지, 현재 평면을 주요 표현 방법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는 도자를 전공했지만 매체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으로 설치, 영상, 페인팅 등 전시기획에 어울리거나 당시 내가 집중하던 주제에 적합한 방식이라고 생각되면 구분 없이 사용했다. 특정기술이 필요한 도자란 분야에선 틀이 너무 많고 기술적인 난해함이 많아 자유롭게 사고하고 작업하는 게 굉장히 힘들다. 도자가 가지는 매력과 장점이 있기에 놓지 않고 있다. 평면작업은 내가 다루는 매체 중 익숙하지 않아 곤혹스런 부분이 많고 그렇기에 고통스러우면서도 관심이 더 가는 부분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좀 더 페인팅에 집중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최근의 전시는 일종의 실험이라 할까, 앞으로 방향을 잡는데 필요한 여러 시도를 해 보는 중이다. 전시기획에 집중한 소재나 구성, 형식적인 면과 표현방법, 그에 따라 파생되는 느낌이나 그 느낌에서 다시 시작되는 표현방식 같은 것들… 아직 뚜렷한 것은 없다. 틀을 만들기보단 표현하고 싶은, 충동적인 감정에 더 집중하고 표현방식을 가다듬는 경우가 많다. 틀 자체가 싫고 특정 표현방식에 매몰되는 자체에 거부반응이 있는듯하다. 이건 도자란 특수환경에서의 억압에 대한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섬-징검다리_조합토, 유약_2008
섬-징검다리_조합토, 유약_2008

 

Q. 예전 작품들을 찾아보니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작가명도 KL&Julie 로 아예 바꾸어서 활동하는 것인가?

작가로서 공백의 시간이 길었다. 다시 시작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그런 과정에서 이전 작업과의 단절이 필요하기도 했고… 물론 연결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른 이름으로 다른 작업을 하고 싶었다. 예전의 나로 읽히는 게 싫었다.

난삽한 우상偶像과 딩검리 섬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9
난삽한 우상偶像과 딩검리 섬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9

 

Q. 이전 작업, 특히 2005~2010 년의 전시작들 위주로 살펴보면 신화적인 요소를 차용하고  그것이 형상화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의미에 대해 다양한 층위의 해석을 보여주었다. 왜 신화적인 부분에 관심이 갔나? 그것이 현재 작업에까지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초기 작업의 경우 개인적인 경험과 환경에서 비롯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필연적으로 발생되는 모순에 질문을 던지고 그 이면을 직접적인 상징물로 표현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우화나 신화적인 인물들을 풍자하거나 재해석함으로써 허구와 실재, 욕망, 체제의 부조리 같은 것을 이야기하려 했다. 지금도 그런 부분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한다. 신화적인 존재는 결국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사유이거나 실재를 극한으로 상징화한 것이고 현재 화 할 수 없는 욕구의 표출이기에 지금도 도자설치 작업이나 일부 페인팅을 통해 이를 비틀거나 변용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Mommy_아크릴채색_85×71cm_2010
Mommy_아크릴채색_85×71cm_2010

 

Q. 어머니, 소녀, 우화의 주인공, 야생성의 동물, 혼종의 괴생명체 등의 형상이 꾸준히 등장한다. 이를 통해 자아에 내재된 세계상과 내면의 본질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지속적으로 등장했던 미노타우로스와 피노키오는 최근 전시에도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이전 작업에서 상당히 그로테스크하고 상징적인 설치나 페인팅으로 보여졌는데, 특히 설치작업에서 개별적인 형상들이 배치되는 방식을 보면 제의적인 형식을 띄는 것이 인상적이다. 최근 전시에서 제기를 쌓아 올린 설치작업과 그 옆에 놓인 인물 토르소, 두상 조형물 등을 배치한 방식을 보아도 그런 부분이 드러난다.

미노타우로스와 피노키오는 인간의 양면성과 대립된 존재들 사이에서의 정체성과 모순에 대한 적합한 상징이자 장치라고 생각했다. 심리적 세계와 신화적 심상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한 모티브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상화 된 신에 대한 비뚤어진 제의식과 기복, 변하지 않는, 부식되지 않는 스테인리스스틸 제기로 상징되는 부패하고 기득권화 된 형식과 권위 등에 대한 비판적인 상징들은 연속된 표현 주제이자 형식 중 하나이다. 미노와 피노키오, 토르소의 상징은 결핍된 존재이지만 그 자체를 완성체로 보는 다른 시선에 있다. 그러나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작품들과의 연결고리 보다는 오히려 과거와의 단절을 통해 과거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욕심이겠지만 직관적이고 충동적인 작업과 통찰하는 작업, 개별자와 사회 체계에 대한 구조의 모순을 얘기하고 비판하는 작업 그리고 지극히 재미로만 일관된, 평화롭고 사소한 주변에 대한 작업을 하고 싶다. 흐트러져 있지만 이 모든 게 ‘나’의 자유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설득 가능하게 관객에게 다가설 수 있는지가 새로운 작업의 시작점이다.

 

'길을 잃다 작은 숨을 쉬다' 설치전경, 2022
'길을 잃다 작은 숨을 쉬다' 설치전경, 2022
박제(剝製)사 피노키오_나무에 아크릴채색, 유채_160×122cm_2008
박제(剝製)사 피노키오_나무에 아크릴채색, 유채_160×122cm_2008
Pieta-Great Minotauros_나무에 유채_123×100cm_2008
Pieta-Great Minotauros_나무에 유채_123×100cm_2008
완벽한 무장-피노키오 코나투스_ 캔버스에 유채, 연필, 32x41cm_ 2020
완벽한 무장-피노키오 코나투스_ 캔버스에 유채, 연필, 32x41cm_ 2020

Q. 그렇다면 최근의 작업에 대해 질문하겠다. 최근 작업, 특히 페인팅에 대해 작가로서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부분이 있나? 과거의 페인팅과는 주제, 밀도, 색채 등의 부분에서 다른 느낌을 준다. 주제는 언뜻 평이하게 보이고, 물감의 농도와 색, 붓질의 속도와 압력도 다르게 보인다. 좀 더 부드러워졌다고 해야할까. 좀 더 조심스럽다고 해야할까. 위에서 말한 과거와 단절된 작업, 새로운 작업은 어떤 것을 말하나?

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건 웃기게 들릴 지도 모르지만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던 자유와 사랑, 평안이다. 지금은 오히려 직접적으로 표현해 자극하기보단 우선 편안하게 다가서고 무엇일까 한번쯤 더 생각하게 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을 뿐이다. 관객에게 더 다가갈 수 있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다. 작업은 어떤 사건에서 오는 분노, 공감, 사랑이나 대상에서 오는 충만한 느낌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페인팅일 수도 있고 설치나 사진, 영상 작업일 수도 있다. 특정 방식만 고집하지 않는다. 내 감정과 영감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표현방식이면 무엇이든 좋다. 과거 작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떤 감정적, 경험적, 감각적 끌림에 의해 대상을 선택하고, 반대로 내가 선택되어지고…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본다. 페인팅의 경우 같은 대상이라 할지라도 항상 변화하는 주체의 심리와 그에 따른 객체의 반작용에 보다 빠르게 즉흥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편안함이 있다. 대상과 나의 관계는 더 밀접해지거나 더 건조해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이런 차이를 어지럽게 느꼈다면 지금은 이를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한다. 감정에 충실하면서도 어떤 부분을 감추거나 드러내고자 하는 설계의지가 작동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 날,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80x65cm, 2022
그 날,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80x65cm, 2022

Q.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리는 사람, 즉 작가에게 대상은 어떻게 정해지는 것인가? 어떠한 대상이 소재로 선택되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당신의 최근 페인팅을 보면 그런 부분이 상당히 모호하게 보인다. 우선 직접 눈에 보이는 것은 제주의 상징인 동백꽃, 오름과 산, 4.3 사건 그리고 세월호이다. 그런데 이것을 표현한 방식은 마치 보는 이가 이것들을 알지 못하길 바라는 것처럼 느껴진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자극이 크다고 반드시 크게 와 닿지 않는다. 보다 적극적으로 관객에게 다가서기 위해 우선 호기심과 편안함을 강조하고자 한 방법이다. 모호함이 주는 호기심과 시각적인 편안함에서 그리고 더 다가설 때 무언가를 더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림의 대상은 정물일 수도, 어떤 사건일 수도 있고 항상 마주치는 사람의 얼굴일 수도 있고 산책 중에 우연히 마주친 장면이거나 우연히 들었던 노래일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골목길 혹은 담벼락에 피어있는 꽃이나 꺾여 널부러진 나뭇가지 하나를 지나치지 못하고 주워 본 적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것은 무의식이나 꿈, 혹은 먼 기억으로부터 어떤 신호를 받아서 일 수도 있고 그 꽃이나 나뭇가지의 색이나 질감, 그것을 감싸고 있는 주변의 사물이 보는 이의 감각을 자극해서 일 수도 있다. 제주의 동백과 산이 4.3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긴 하지만 내게는 개인적인 감각에 더 가깝다. 어머니가 직접 내게 전달해주는 내용이고 체험이며 공포이고 어머니의 꽃이고 풍경이다. 나는 어머니의 자식이다. 교육받지 못했던 과거가 멀게만 느껴졌던, 그 참혹함이 어느 순간 내 주변의 이야기고 늘 가까이 있었다는 걸 이제서야 느끼고 있다. 이것은 긴 세월 고향을 떠나 있던 내가 고향에 머물면서 느끼는 기묘한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대상이 전혀 이질적인 모습으로 당혹스럽게 다가온다. 늘 곁에 있었지만 내가 거부했던 억눌렀던 감정이 특정 시기에 폭발한 것 같은. 하지만 내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멀어지는 느낌. 무언가 잠시 닿았다는 감각만이 손에 남아있는데 그것을 되새기고 싶었다.

'길을 잃다 작은 숨을 쉬다' 설치전경, 2022
'길을 잃다 작은 숨을 쉬다' 설치전경, 2022
​'길을 잃다 작은숨을 쉬다' 설치 전경, 2022'길을 잃다 작은숨을 쉬다' 설치 전경, 2022
​'길을 잃다 작은숨을 쉬다' 설치 전경, 2022'길을 잃다 작은숨을 쉬다' 설치 전경, 2022

Q. 그것은 부재에 대한 감각일 수 있겠다. 어떤 대상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반복적 감각으로 인한 상실감, 그것이 작업의 동력이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한 대상이 작가의 관심을 끌었다면, 그것도 그림으로 그려질 만큼 충분하게. 그렇다면 이미 그 대상과의 관계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하면 되는 것인가? 위에서도 물었지만 당신은 무심하게 바라볼 수 없는 것들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해석하거나 생각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보는 이의 감정보다는 대상과의 오랜 관계맺음을 통해 내면 깊숙이 숨어 있는 작가 본인의 감각과 감정들을 발굴하는 데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나는 어떤 대상을 오래도록 생각하고 바라보며 그것이 죽어가거나 사라지거나 변화해가는 과정을 캔버스에 담아내고 싶다. 그것이 대체로 희미하고 무심하게 보이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감정 없이 다가서는 게 감정을 더 자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떤 사물(사건)과 내 생각 속에서 파생된 이미지들을 서로 조합하면서 이것들 간의 최적의 관계를 찾아내고 거기서 파생되는 에너지가 긍정적으로 전달됐으면 한다.

푸른 베개_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 76x70cm_ 2022(설치전경)
푸른 베개_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 76x70cm_ 2022(설치전경)

Q. 그 말은 어떤 주제와 그것을 표현하는 매체 간의 적합성을 의미하는 것인가? 세월호를 상징하는 진흙배를 영상으로 담아내거나 조동익의 ‘푸른배게’ 노래를 풀어진 캔버스에 물감을 슬쩍 묻히며 흐르게 그린 것처럼?

어떤 사건들은 시간이 지나 결국 흐릿해지거나 사소해진다. 결국 지나쳐버리기 쉽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제 목소리와 색을 남긴다. 결국 우리의 주의를 환기하는 순간이 온다. 그것을 담아내는 데 적절한 방법을 찾다 보니 여러 매체를 사용하게 된다. 조동익의 푸른배게는 제주의 역사를 느끼고 현재를 감각하는, 온전히 개인적인 시간 속 감정을 따라가며 그려 본 것이고 단단하게 고정된 캔버스보다는 틀이 없는, 얽매이지 않은 느슨한 화면이 적합해 보여 작업한 것인데 시간과 습도에 따라 조금씩 뒤틀리고 있어 흥미롭다. 그 때의 감성에 충동적으로 작업한 결과물인데 액자틀에 가둘 수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진흙배 작업은 흙의 물성 연구를 통해 물 속에서 흙이 분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도 여러 번 시도되었던 방식의 작업이다. 모든 걸 잃었던 사람들과 제주의 역사가 연결된 지점이 느껴져 작업하게 되었다. 지금도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되새기려 작업했다.

매일 비 내리는 날_단채널 영상_11분 57초_2022
매일 비 내리는 날_단채널 영상_11분 57초_2022
산방덕, 캔버스에 유채, 35x27cm, 2022
산방덕, 캔버스에 유채, 35x27cm, 2022
푸르고 붉은 꽃_ 캔버스에 유채, 38x46cm, 2022
푸르고 붉은 꽃_ 캔버스에 유채, 38x46cm, 2022

 

Q. 꽃(동백)과 산을 여러 번 그렸다. 드로잉처럼 가볍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몇 개의 작업을 보다 보니 세잔이 떠올랐다. 특히 산 작업은 터치 하나하나에 각각의 몸을 부여하려는 것처럼 구축적이다. 붓질이 보이고 산이 보이고 다시 평면으로 환원되는 듯한. 여러 겹의 붓질들로 범벅된 덩어리가 다시 평면으로 스며드는 듯 보인다.

맞다. 세잔의 작업을 떠올린다. 동백과 오름(산)을 보며 여러 번 반복해 그리고 있다. 지금은 드로잉에 가깝게 그리고 있지만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다른 방식으로 그려보고 싶다. 질문한 것처럼 좀 더 단단하고 구조적으로 보이도록 작업하고 있다. 그러고 나서 해체하고 싶다. 그 구상을, 색을 해체해 자유롭게 하고 싶다.

 

상처, 캔버스에 유채, 45x53cm, 2022
상처, 캔버스에 유채, 45x53cm, 2022
'길을 잃다 작은숨을 쉬다' 설치 전경, 2022
'길을 잃다 작은숨을 쉬다' 설치 전경, 2022

 

Q. 제주를 떠난 지 오래이고 지금은 다시 서울과 제주를 오가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는데, 두 삶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하다.

별다른 건 없다. 그저 한 곳에서의 삶에 지쳤을 때 다른 한 곳으로 잠깐 가서 지낸다. 일종의 도피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고향에서의 시간과 서울에서의 삶의 시간이 비슷하다. 여기도 저기도 소속감이 없지만, 외롭지만 여기도 저기도 갈 수 있는 자유를 느끼기도 한다. 여유가 넘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여러가지 상황상 그리 되었을 뿐이다. 언제까지 이런 삶이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틀을 만들지 않으면서 나를, 주위를 환기시키고 환원하고 다시 해체시키는 작업을 계속해서 하고싶다.

난삽한 우상偶像과 딩검리 섬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9
난삽한 우상偶像과 딩검리 섬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9

(사진=케이엘 앤 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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