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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저울 앞에 선 유리작가, 허혜욱의 새로운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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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와 일상 사물 결합해 새로운 조형 언어 선보여 초록 저울 위 유리, 원점의 사유 상징하는 작품 중심 퍼포먼스 사방치기 통해 창작자의 시행착오 삶 표현

유리작가 허혜욱의 개인전 《제로그램(zerogram)》이 11월 5일부터 16일까지 갤러리 보고재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허혜욱이 유리라는 재료에 집중해온 작업 방식을 되돌아보며, 완성된 작품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서 사용된 도구와 파손된 유리, 일상적인 사물까지 예술적 표현의 대상으로 확장한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작가는 창작의 실패와 완성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전시의 중심에는 초록색 저울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 유리가 올려져 있다. 저울의 바늘은 0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는 작품의 가치를 수치로 측정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상징한다. 과거 공모전 출품을 위해 준비하던 중 파손된 유리작업은 이제 실패의 결과물이 아닌 창작의 시간과 가능성을 담고 있는 대상으로 재조명된다.

작업실에서 사용하던 나무 도구에 눈을 그려 넣거나, 유리와 콘센트, 벽면의 선을 결합해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내는 작업도 관객의 시선을 끈다. 익숙한 사물들이 예상치 못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유리공예의 표현 영역은 설치와 오브제로 확장된다.

퍼포먼스 〈사방치기_허혜욱 되기〉에서는 작업실 정리와 일상적인 습관, 신체의 움직임을 예술적 행위로 연결한다. 이 과정은 창작자의 삶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는 모습을 놀이의 형식으로 보여준다.

미술평론가 안현정은 이러한 변화를 과거를 지우는 것이 아닌, 축적된 경험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원점의 사유(Zero Base)'로 해석한다. 《제로그램》은 실패와 완성, 쓸모와 무용의 경계를 재조명하며, 익숙한 재료와 사물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예술적 전환을 제시한다.

전시작 중 하나인 초록색 저울 위의 유리는 위쪽에 노란빛이 얇게 걸려 있고, 아래로는 짙은 회녹색 형상이 둥글게 내려앉아 있다. 이 어긋남은 가벼워진다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허혜욱은 오랫동안 유리의 안과 밖을 탐구하며 작업해왔고, 이제는 하나의 형태를 완성하는 데서 그 형태를 만드는 과정으로 관심을 옮기고 있다.

작가는 과거의 파손된 유리작업을 다시 꺼내며, 실패라는 결론 뒤에 남은 가능성을 살핀다. 저울의 0은 작품의 가치를 매긴 점수가 아니라, 스스로 내렸던 판단을 잠시 내려놓는 원점이다. 이는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지나온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는 선택을 의미한다. 허혜욱은 "유리는 열을 만나면 생물이 됩니다"라고 말하며, 유리를 살아 있는 상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강조한다.

작업실에서 발견한 다른 얼굴전시작에서는 유리와 주변 사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검게 변한 나무 도구의 손잡이에 그려진 눈은 관객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벽면에서는 콘센트와 잎의 형상을 담은 둥근 유리가 나란히 놓여 있으며, 이들의 간격과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가 생겨난다.

퍼포먼스 〈사방치기_허혜욱 되기〉는 작업실을 정리하고 일상의 작은 습관을 예술적 행위로 연결한다. 작가는 작업의 치열함을 놀이로 옮기며,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조금 다른 거리에서 바라본다. 실패로 여겼던 일이 다른 선택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쓸모를 다했다고 생각한 사물을 다시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관객에게 각자의 판단을 잠시 미뤄볼 시간을 건넨다.

《제로그램》을 관람할 때는 유리뿐만 아니라 그 곁의 사물과 선, 사물 사이의 간격까지 함께 살펴보기를 권장한다. 허혜욱의 변화는 가벼워진다는 것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일이 아니라, 오래 지녀온 것을 다른 위치에 놓아볼 자유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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