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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혜영의 아트명상] 고요한 풍경 속에서 만난 한 사람의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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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유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석파정 서울미술관

김상유, 1990, 대산루 (사진. 강혜영)
김상유, 1990, 대산루 (사진. 강혜영)
석파정 옥상 정원 (사진. 강혜영)
석파정 옥상 정원 (사진. 강혜영)

평창동 석파정 서울미술관에 들어서 전시장을 지나 루프탑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이어지는 계곡과 오래된 나무, 바위와 정자가 어우러진 석파정의 정원이다. 현대적인 미술관 건물 너머에 자리한 이곳은 도시 한가운데서 잠시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공간이다.

석파정 (사진. 강혜영)
석파정 (사진. 강혜영)

바위 석(石), 언덕 파(坡), 정자 정(亭). ‘바위 언덕 위의 정자’라는 뜻을 가진 석파정은 자연의 지형을 최대한 살린 한국 전통 정원이다. 조선 후기 대신 김흥근의 별장 ‘삼계동정사’였던 곳으로,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면서 ‘석파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호흡이 느려진다. 물소리와 나무, 바위와 정자가 만들어내는 고요 속에서 현재의 감각에 머물게 된다. 이처럼 ‘고요’를 품은 공간에서 김상유의 작품을 만나는 일은 전시 자체를 하나의 감상 경험으로 만든다.

현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는 김상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이 열리고 있다. 전시는 8월 17일까지 이어진다.


김상유, 1990, 대산루 (사진. 강혜영)
김상유, 1990, 대산루 (사진. 강혜영)

대청마루 위 한 사람, ‘침잠(沈潛)’의 시간

전시장에 들어서면 김상유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대청마루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사람. 초가집과 한옥, 정자와 사찰 등 공간은 달라지지만 인물은 늘 고요한 자세로 앉아 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하지만, 나무와 꽃, 새와 나비가 화면에 생명력을 더하며 조용한 시간이 흐른다. 작품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듯한 명료한 시선이 느껴진다.

시경루, 1989 (사진. 강혜영)
시경루, 1989 (사진. 강혜영)

선비의 공간에서 선비의 마음으로

김상유는 아름다운 별당이나 정자를 보면 며칠씩 머물며 작품에 담곤 했다. 특히 옛 선비들의 공간에 주목했다. “통상적인 주거공간과는 달리 정자에는 옛 선비들의 파격의 미랄까, 여유 같은 것들이 배어있습니다.” 작가는 과거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하향정(荷香亭), 1992년 (사진. 강혜영)
하향정(荷香亭), 1992년 (사진. 강혜영)

1970년대 중반부터 4~5년 동안 전국의 유명한 고건축을 찾아다닌 그는 정자와 서원, 사찰에 직접 머물며 그 풍경과 정신을 작품에 담았다. 정자와 대청마루, 사찰은 사방이 열려 있는 공간이다. 문을 열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의 작품 속 공간 역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과 함께 존재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담아내는 장소다.

전시전경 (사진. 강혜영)
전시전경 (사진. 강혜영)

시서화일치, 전통의 정신을 새기다

김상유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동양적 미감이다.

조선 문인사회에서 시와 서예, 그림은 서로 분리된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경지를 이루는 예술이었다. 김상유의 목판화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 속 글과 그림은 함께 어우러지며 조선 문인의 정신과 풍류를 전한다.

‘산중에 달력 없어 철 가는 줄 모르노라. 꽃 피면 봄이요, 잎 지면 가을이라. 아해들 헌옷 찾으면 겨울인가 하노라.’ 목판화 (출처. 김상유 작품 회고집) 
‘산중에 달력 없어 철 가는 줄 모르노라. 꽃 피면 봄이요, 잎 지면 가을이라. 아해들 헌옷 찾으면 겨울인가 하노라.’ 목판화 (출처. 김상유 작품 회고집) 

작품 속 글은 그림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화면의 정서를 완성하는 요소다.

‘청산도 절로 녹수도 절로 나도 절로절로’라는 문구에서도 자연과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출처. 김상유 작품 회고집)
(출처. 김상유 작품 회고집)

독학으로 완성한 동판화

김상유는 판화의 불모지였던 한국 미술계에 동판화를 본격적으로 선보인 작가다. 1963년 동판화 개인전을 시작으로 목판화와 유화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작업을 이어갔다.

전시전경 (사진. 강혜영)
전시전경 (사진. 강혜영)
김상유 작가의 동판화 (사진. 강혜영)
김상유 작가의 동판화 (사진. 강혜영)

특히 그는 동판화 작업을 독학으로 완성했다. 국수 기계를 조립해 만든 원시적인 판화기를 이용해 작업을 이어간 그의 삶은 끊임없는 실험과 노력의 연속이었다.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은 사람

작품 속에는 한 명의 인물과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을 만큼 단촐한 공간, 절제된 색과 선이 등장한다. 고독하지만 외로워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에 깊이 머무르는 충만함이 느껴진다.

속리독락(俗離獨樂) (사진. 강혜영)
속리독락(俗離獨樂) (사진. 강혜영)

작품 속 인물은 대낮에도 눈을 감고 있다. 그림 속은 태양이 떠 있고 세상이 움직이는 시간이다. 그가 감은 눈은 세상을 외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 위한 시선처럼 보인다. 그 속엔 홀로 조용히 느끼는 기쁨이 스며들어 있다. 

시력이 흐려져도 멈추지 않았던 사람

김상유의 삶이 작품 속 인물처럼 언제나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동판화 작업에 사용되는 독성 물질의 영향으로 녹내장을 앓게 되었고 점차 시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시력이 흐려지자 금속에서 나무로, 목판화에서 다시 유화로 작업의 방향을 옮겼다.

김상유 작가의 목판화 작업 (사진. 강혜영)
김상유 작가의 목판화 작업 (사진. 강혜영)

‘시력은 흐려졌지만, 손의 감각은 더 또렷해졌다.’ 이 문장은 김상유의 작업 여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인천 동산중학교에서 미술과 영어를 가르쳤고, 이후 서울에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덕성여자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도 전시와 작업을 계속했다. 두 딸을 키운 아버지이자 교육자였고 예술가였다.

전시전경 (사진. 강혜영)
전시전경 (사진. 강혜영)

‘은둔과 고독의 화가’라는 이름 너머

김상유에게는 오랫동안 ‘은둔과 고독의 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둘째 딸 김삼봉 씨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달랐다. 그녀는 회고집에서 아버지가 ‘은둔과 고독의 화가’로 기억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전한다.

그녀가 바라본 아버지의 삶은 그림과 가족, 친구들, 전시와 강의로 채워져 있었다. 시력이 약해지고 판화 작업을 이어가기 어려워진 이후에도 전국의 산과 사찰을 여행하며 그 풍경을 유화로 남겼다.

그의 손에서 그림 도구가 놓인 적은 없었다.

낙락백세(樂樂百世), 1990년대 작품 (사진. 강혜영)
낙락백세(樂樂百世), 1990년대 작품 (사진. 강혜영)

작가는 두 딸을 종종 ‘새’로 표현하기도 했다. 지붕 위에 새초롬하게 앉아 있는 새의 모습에는 두 딸을 향한 아버지의 애정이 담겼다.

고요한 작품 세계 안에서도 가족을 향한 다정한 시선은 그렇게 살아 있었다.

쉽게 닳지 않는 사람

김상유는 1926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2002년 서울에서 생을 마쳤다. 한국전쟁과 전후의 격동을 지나온 세대였고 평생 건강의 어려움도 겪었다.

그러나 자신의 길을 멈추지 않았다.

고요함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눈을 감는다고 해서 세상을 외면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 김상유의 작품 속 인물은 바로 그러한 삶의 태도를 보여준다.

전시의 제목인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작가의 작품뿐 아니라 그의 삶을 향한다. 꾸준히, 끊임없이, 부단히 자신의 길을 걸어간 사람. 그가 남긴 풍경은 고요하지만 결코 비어 있지 않다. 그 안에는 자연과 전통, 가족과 삶, 그리고 한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며 살아온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김상유 작품을 통해 '나'를 만나는 시간

전시장 밖으로 나와 다시 석파정의 정원을 걸어본다.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정자와 나무, 바위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전시장 안에서 만났던 김상유의 인물처럼 잠시 걸음을 멈춰보는 시간 속에서 고요히 명상하는 '나'를 만난다.

석파정 옥상 정원 (사진. 강혜영)
석파정 옥상 정원 (사진. 강혜영)

작품 속 인물이 눈을 감고 자신을 들여다보듯, 관람객 역시 전시장에 머무는 동안 바쁜 일상에서 한 걸음 물러나 지금의 나를 돌아볼 수 있다.

김상유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은 8월 17일까지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가 김상유의 작품과 삶을 만나는 시간이자, 그 작품을 바라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출처. 석파정 서울미술관 홈페이지
출처. 석파정 서울미술관 홈페이지

김상유 탄생 100주년 기념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

전시기간 | ~ 2026년 8월 17일

장소 | 석파정 서울미술관

관람료 | 20,000원

주차 | 평일 2시간, 주말 1시간 30분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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