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동 석파정 서울미술관에 들어서 전시장을 지나 루프탑 계단을 오르면 예상치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이어지는 계곡과 오래된 나무, 바위와 정자가 어우러진 석파정의 정원이다. 현대적인 미술관 건물 너머에 자리한 이곳은 도시 한가운데서 잠시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공간이다.
바위 석(石), 언덕 파(坡), 정자 정(亭). ‘바위 언덕 위의 정자’라는 뜻을 가진 석파정은 자연의 지형을 최대한 살린 한국 전통 정원이다. 조선 후기 대신 김흥근의 별장 ‘삼계동정사’였던 곳으로, 흥선대원군이 별장으로 사용하면서 ‘석파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계곡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호흡이 느려진다. 물소리와 나무, 바위와 정자가 만들어내는 고요 속에서 현재의 감각에 머물게 된다. 이처럼 ‘고요’를 품은 공간에서 김상유의 작품을 만나는 일은 전시 자체를 하나의 감상 경험으로 만든다.
현재 석파정 서울미술관에서는 김상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회고전 《쉽게 닳지 않는 사람》이 열리고 있다. 전시는 8월 17일까지 이어진다.
대청마루 위 한 사람, ‘침잠(沈潛)’의 시간
전시장에 들어서면 김상유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온다. 대청마루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은 사람. 초가집과 한옥, 정자와 사찰 등 공간은 달라지지만 인물은 늘 고요한 자세로 앉아 있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하지만, 나무와 꽃, 새와 나비가 화면에 생명력을 더하며 조용한 시간이 흐른다. 작품 속 인물은 눈을 감고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듯한 명료한 시선이 느껴진다.
선비의 공간에서 선비의 마음으로
김상유는 아름다운 별당이나 정자를 보면 며칠씩 머물며 작품에 담곤 했다. 특히 옛 선비들의 공간에 주목했다. “통상적인 주거공간과는 달리 정자에는 옛 선비들의 파격의 미랄까, 여유 같은 것들이 배어있습니다.” 작가는 과거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4~5년 동안 전국의 유명한 고건축을 찾아다닌 그는 정자와 서원, 사찰에 직접 머물며 그 풍경과 정신을 작품에 담았다. 정자와 대청마루, 사찰은 사방이 열려 있는 공간이다. 문을 열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의 작품 속 공간 역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과 함께 존재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담아내는 장소다.
시서화일치, 전통의 정신을 새기다
김상유의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동양적 미감이다.
조선 문인사회에서 시와 서예, 그림은 서로 분리된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경지를 이루는 예술이었다. 김상유의 목판화에서도 이러한 전통을 발견할 수 있다. 작품 속 글과 그림은 함께 어우러지며 조선 문인의 정신과 풍류를 전한다.
작품 속 글은 그림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라 화면의 정서를 완성하는 요소다.
‘청산도 절로 녹수도 절로 나도 절로절로’라는 문구에서도 자연과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독학으로 완성한 동판화
김상유는 판화의 불모지였던 한국 미술계에 동판화를 본격적으로 선보인 작가다. 1963년 동판화 개인전을 시작으로 목판화와 유화에 이르기까지 40여 년간 작업을 이어갔다.
특히 그는 동판화 작업을 독학으로 완성했다. 국수 기계를 조립해 만든 원시적인 판화기를 이용해 작업을 이어간 그의 삶은 끊임없는 실험과 노력의 연속이었다.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은 사람
작품 속에는 한 명의 인물과 한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을 만큼 단촐한 공간, 절제된 색과 선이 등장한다. 고독하지만 외로워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혼자만의 시간에 깊이 머무르는 충만함이 느껴진다.
작품 속 인물은 대낮에도 눈을 감고 있다. 그림 속은 태양이 떠 있고 세상이 움직이는 시간이다. 그가 감은 눈은 세상을 외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 위한 시선처럼 보인다. 그 속엔 홀로 조용히 느끼는 기쁨이 스며들어 있다.
시력이 흐려져도 멈추지 않았던 사람
김상유의 삶이 작품 속 인물처럼 언제나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동판화 작업에 사용되는 독성 물질의 영향으로 녹내장을 앓게 되었고 점차 시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시력이 흐려지자 금속에서 나무로, 목판화에서 다시 유화로 작업의 방향을 옮겼다.
‘시력은 흐려졌지만, 손의 감각은 더 또렷해졌다.’ 이 문장은 김상유의 작업 여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