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은 오는 2026년 3월 22일까지 한운성 컬렉션 기증기획전 《그림과 현실》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2023년 한운성 작가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195점의 판화 컬렉션과 미술 소장품을 중심으로, 예술가이자 교육자로서 평생에 걸쳐 이어온 그의 예술적 탐구를 조망한다.
한운성은 회화, 판화, 디지털 드로잉을 넘나들며 시대의 기술과 시각 환경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수용해온 작가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질문은 “현실은 어떻게 이미지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이다. 이번 전시는 매체와 형식의 변화 속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져 온 그 질문의 궤적을 따라간다.
1970년대 초 미국 필라델피아 타일러 미술대학 판화과 유학 시절, 한운성은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판화 기법을 습득하며 본격적인 매체 실험에 몰두했다. 이후 1978년 국내 최초의 판화 전문서 『판화세계』를 출간하며 판화 이론과 기법의 체계를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1972년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한 뒤, 한국인 최초 미술 분야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템플대학교 타일러 미술대학 대학원 판화과에 진학한 시기의 작업이 소개된다. 1974년부터 시작된 〈캔〉 시리즈는 한운성 작업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이후 작가의 방향성을 분명히 제시한 대표적인 초기작으로 평가된다.
한운성, '쌍매듭', 1988, 종이에 에칭, 애쿼틴트, 76x108 (사진=강혜영)
1979년부터 1998년까지 이어진 <문, 받침목, 매듭> 연작
한국의 일상적 소재를 바탕으로 재현적 이미지에 은유적 메시지를 더한다. 특히 ‘매듭’은 실제 크기와 무관하게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표현되며, 강렬한 명암 대비와 세밀한 묘사를 통해 결합과 지지라는 본래의 기능을 강조한다. 풀리지 않는 매듭의 형상은 한국 사회의 갈등에서 비롯된 개인적 응어리이자, 해결되지 않은 남북 분단에 대한 염원, 나아가 서로 얽히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상징한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현실과 가상이 교차하는 공간을 제시한다. 명암과 입체, 원근에 대한 치밀한 탐구를 통해 긴장감 있는 시각 구조를 구축하며, 작가 특유의 공간 인식을 드러낸다.
한운성, '눈먼 신호등', 1974, 종이에 석판화, 76x57 (사진=강혜영)
<신호등> 시리즈(1974–1997)
미국 체류 중 천으로 덮인 고장난 신호등을 목격한 경험에서 출발한다. 기능을 상실한 신호등은 문명 사회의 불안과 인간 존재의 무력함을 상징하며, 폐허와 인간이 공존하는 풍경 속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소외와 불평등, 문명 이후의 공허를 환기한다.
한운성, '신호등' 시리즈, 1997, 종이에 디지털 피그먼트 프린트, 각 29.7x21 (사진=강혜영)
왼쪽. '말루스 푸밀라, 2009' 오른쪽. '천도복숭아, 2008' (사진=강혜영)
후기 작업
생명에 대한 사유와 디지털 매체로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1990년대 이후 전개된 〈과일채집〉 시리즈는 생명 그 자체의 순수한 형태를 탐구하며, 은퇴 이후에는 〈꽃〉 연작을 통해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멸의 순간을 담아낸다. 1992년부터 이어진 디지털 드로잉 작업은 신체적 한계를 넘어 매체를 확장한 결과로, 아이패드와 디지털 펜을 통해 ‘그림을 놓지 않으려는’ 작가의 의지를 보여준다.
한운성, '금영화', 2025, 캔버스에 유채, 181x259 (사진=강혜영)
한운성 전시 전경 (사진=강혜영)
한운성은 평면의 구상을 위해 판화를 선택했고, 어깨에 부담이 오르자 붓을 들었으며, 화실에 갈 수 없게 되자 디지털 기기를 손에 쥐었다. 그에게 작업은 멈출 수 없는 소통의 방식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관람자와 나누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림과 현실》은 이미지와 현실 사이를 끊임없이 질문해온 한 예술가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 질문을 오늘의 관람자에게 다시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