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벌이는 체스이다. 한 인간의 내면에서 폰, 나이트, 비숍, 룩, 퀸, 킹이 각각의 역할을 하며 죽음과 대결을 펼친다. 우리는 흔히 죽음을 망각하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삶이란 결국 평생 동안 죽음과 체스를 벌이는 게임이 아닌가 싶다. 윤동주의 <서시> 중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 표현한 부분이 의미심장하다. 본질을 알고 있는 문장이다. 삶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인생'이란 마라톤의 결승선 너머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길게 보면 인생은 마라톤이며 오래 걸리는 체스 한 판이다. 그렇지만 하루하루의 단위로 보면 그 속은 단거리 경주로 이루어진 미니게임이다. 게임은 선택의 연속이며 인간의 삶 역시 그렇다. 모든 말이 살아남을 수는 없듯이 한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퀸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는 나이트와 비숍 정도는 희생해야 한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킹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표현한 체스판 앞에서 관람객은 죽음에 맞서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8x8 네모칸 안에 인생을 함축한 개성 있는 작품이다.
매 순간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뇌 하며 보낸 하루 끝에 우리는 죽은 듯이 쓰러져 잠이 든다. 죽음을 표현하는 단어 중 '영면(永眠)'은 영원한 잠을 뜻한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잠은 곧 '일시적인 죽음'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 죽은 것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잠을 죽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필자의 생각은 좀 다르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나면 '어제의 나'로는 절대로 돌아갈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은 죽음의 성질이다. '어제의 나'는 부활할 수 없고 '오늘의 나'는 내일이면 죽는다. 물론 똑같은 나의 모습이 반복된다고 여길 수 있다.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지점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자각한 인간은 본래의 삶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루의 끝을 죽음처럼 인식하게 된다면 마주하는 모든 날들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폰은 처음 움직일 경우 딱 한번 2칸 앞으로 갈 수 있다. 죽음과의 체스에서 내가 먼저 2칸을 내딛으면 어떨까. 내가 먼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갈수록 삶으로 채우는 영역이 늘어나며, 오히려 죽음의 폰은 앞으로 전진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물론 죽음은 게임판 자체를 뒤엎어버리며 '예기치 못한 사고'를 우리에게 부여할 수도 있다. 그것마저 막을 방법은 없다. 다만, 설령 그러할지라도 최소한 내가 먼저 전진하여 나아간 영역만큼은 확실히 삶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에 귀의 하는 것을 이상향으로 두었다. 그렇지만 필자는 21세기의 '신 앞에 선 단독자'는 오히려 신과 1:1로 대결을 펼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애니 <종말의 발키리>(Record of Ragnarok)를 재미있게 감상했다. 인간은 패배할 줄 알면서도 신에게 도전하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주어진 삶을 매 순간 전력을 다해 살아가며 지나간 과거에 후회하지 않는다면, 최소한 죽음과의 대결에서 무승부는 하지 않을까 싶다.
Oper Bomse는1996년생 라트비아 출신 현대 미술가로, 거리 예술 그룹 BOMSE의 공동 창립자다. 그는 현장 맞춤형 설치 미술과 입체 작품에 주력하며, 스트리트 아트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23년 즈제움 아트 센터에서 'Field of Vision' 전시를 개최했다.
김경민 작가, 집으로 외. 키아프 [사진=신은서]
김경민 작가 <집으로>, <사랑꾼>, <진심>
따뜻한 가족애가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동시에 해골이 된 여인을 중앙에 배치한 점이 의미심장하다. 왠지 팀 버튼 감독의 <유령 신부>도 떠오른다. 관람자는 사랑과 죽음을 동시에 사색하게 된다. 사랑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한 작가의 고뇌가 느껴지는 지점이다. 그리고 문득 서로 상반되는 요소라고 생각했던 둘이 사실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프로이트는 원초아(id)의 양면이 '에로스(사랑, 탄생)'와 '타나토스(파괴, 죽음)'라고 했다. 인간은 무의식 가장 깊은 곳의 본능에서부터 삶의 욕망과 죽음의 욕망이 동시에 작용하며 두 사이를 허우적대는 존재이다. 그리고 사랑은 둘의 중앙에 놓인 외나무다리에서 손으로 잡고 의지할 수 있는 밧줄이 되어준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삶의 끝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유한한 존재는 그렇게 무한한 생명을 이어왔다. 흔히 남녀의 사랑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가족애는 이성 간의 사랑을 넘어선 더욱 복합적인 감정이다. 또한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한다. 혹시 시간 여행을 꿈꿔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흔히 빛보다 빠르게 가면 미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알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시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물리학적으로 어떤 이론을 접목하더라도 과거로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한다. 전자는 시간의 방향을 역행할 수 없고, 후자는 애초에 미래나 과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만약 나를 닮은 생명체가 가장 작고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자라는 모습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마치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 그 존재는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며 살아간다. '나'인 듯 '나'가 아닌 오묘한 생명체에게 느끼는 사랑은 숭고함이며 경이로움인 셈이다. 때문에 작품 <집으로>에서 느껴지는 행복함은 어느 누구와의 관계에서도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의 장면 중 미겔은 죽은 이들을 앞에서 사랑의 노래인 'Un poco loco'를 부른다. 필자는 이승과 저승을 초월하여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상징적인 장면이라고 본다. 필자는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그 반쪽이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족애는 가장 일상적인 모습으로 현재를 넘어 영원을 향한다. 사랑이 낳는 것은 '시간'이다. 그 속에서 미래를 꿈꿔본다.
김경민 작가는 작가 본인 가족의 일상을 위트있게 조각으로 표현하는 작가이다. 가족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자전거를 타는 풍경, 아이들과 목욕하는 행복한 엄마, 밝은 표정으로 출근하는 아빠 등 우리 주변에 흔히 있는 일상을 작가만의 상상력으로 밝고 활기차게 표현하였다. 성신여자대학교 및 대학원의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다. 1997년 서경 갤러리, 공평 아트센터초대전에서 시작한 제 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꾸준히 개인전 및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성신조각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회원, 한국구상조각회 회원,여류조각가회 회원, 고양조각가협회회원으로 활동하는 작가이다. 강원대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사랑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Oper Bomse의 Chess를 보며 죽음과의 대결은 어떻게 맞서야 할 지를 고뇌 해본다.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김경민 작가의 조형물에 담긴 사랑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는 듯하다. '나 자신'이 '킹'이라면 '사랑'이라는 말이 바로 '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퀸이 지켜야 하는 것은 룩, 비숍, 나이트보다도 오히려 '폰'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약한 말인 폰은 게임 후반에 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바로 '폰'이다. 작품 <집으로>의 화목함처럼, 아이들은 부모의 '가족애' 라는 사랑 속에서 지켜질 때 비로소 새로운 미래가 될 수 있다. 훗날 반드시 죽음은 나에게 '체크 메이트'를 선언할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마지막 칸에 도달한 폰을 보며 후회 없는 게임이었다고 의연하게 미소 짓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