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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채은의 ‘시간키우기’, 시간을 심는 여신의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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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의 시조에서 달리의 시계까지, 이어지는 시간의 예술

성채은, 시간 키우기 직접 촬영
성채은, 시간 키우기 직접 촬영

 

문득 떠오르는 시조 한 편이 있다. 동짓달 긴 밤을 잘라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고 싶다던 황진이의 노래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봄바람 이불 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님 오시는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시간을 잘라내어 저장하고, 다시 펼친다는 발상은 단순한 서정적 상상력을 넘어선다. 마치 신화 속 신들의 능력을 닮아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시간을 지배했던 크로노스가 그러했다. 제우스의 아버지이자 신들의 운명을 쥔 크로노스처럼, 황진이는 시간을 인간의 손에 붙잡아두고자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은 시간을 재단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어왔음을 알 수 있다.

성채은 작가의 작품 〈시간키우기〉는 바로 이러한 ‘시간의 상상력’을 현대적으로 시각화한다. 화면을 채운 초록빛은 부드럽지만 강렬하고, 싱그러움 속에서 기백이 느껴진다. 호기롭지만 우아한 힘, 외유내강의 조화가 이 작품의 미덕이다. 전국의 내로라하는 선비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황진이의 기개처럼, 작품 속에서도 당당한 기운이 살아 숨 쉰다.

이 작품은 동시에 초현실주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의 〈기억의 지속〉을 환기시킨다. 달리가 묘사한 시계는 고체처럼 견고한 것이 아니라 액체처럼 흘러내린다. 시간은 불안정하며 언제든 형태를 바꿀 수 있다는 은유다. 반면 성채은의 시계는 ‘흐름’보다 ‘성장’에 가까운 이미지를 던진다. 금방이라도 초록의 넝쿨이 시계 위로 자라 오를 듯하다. 마치 동화 〈잭과 콩나무〉 속 콩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생명성을 품는다. 시간은 흘러내리는 것이 아니라, 뿌리내리고 자라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채은은 ‘시간의 여신’이라 불릴 만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시간에 매혹되는가. 그것은 시간 자체가 가장 귀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밸런스 게임의 질문 하나를 던져보자. “워런 버핏과 몸을 바꿀 수 있다면?” 아마 버핏은 20대의 젊음을 되찾기 위해 전 재산을 내놓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이는 버핏의 재산보다 자신의 젊음을 택한다. 누구도 100세 노구의 몸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젊음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천부(天賦)의 자산’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라고 말했다. 노년의 시선에서 보면 젊음은 한없이 값진 자원이다. 그러나 정작 젊음 속에 사는 이는 그 가치를 체감하지 못한다. 성채은의 **〈시간키우기〉**는 바로 그 맹점을 찌른다. 시간을 심고, 가꾸고, 키워야만 진정한 자산으로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시간을 다루는 작업이다. 그림은 순간의 시간을 붙잡고, 음악은 시간을 흐르게 하며, 건축은 시간을 품은 공간을 만든다. 성채은의 작품은 이 오래된 질문에 새로운 답을 제시한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키워내야 할 생명이라는 것.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젊음을 자라나게 하고, 기억을 뿌리내리며, 삶을 꽃피울 수 있다.

성채은의 〈시간키우기〉는 단순한 회화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본질을 묻는 철학적 선언이자, 젊음을 향유하라는 예술적 권유다. 황진이의 시조와 달리의 시계를 넘어, 성채은의 붓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키워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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