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조각의 아버지라 불리는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와 프랑스와의 연인은 깊다. 브랑쿠시는 1876년 루마니아의 한 소도시에서 태어나 1901년 부카레스트 미술 대학을 졸업한 후, 더 깊이 있는 탐구를 하기 위해 1903년 걸어서 파리에 온다. 1957년 삶을 마감할 때까지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했던 브랑쿠시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자신의 작업실을 프랑스 정부에 헌정할 정도로 프랑스에 애정이 깊었다. 지금 프랑스 근현대 미술관,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는 그의 두 번째 회고전 ‘l’art ne fait que commencer’(예술은 시작되었을 뿐이다)을 열어, 브랑쿠시의 프랑스에 대한 애정과 그의 작품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눈여겨 볼 몇 가지를 추려보았다.
◆ 세노그라피 – 영화 예고편을 보는 듯한 기분
첫 섹션 'Blancheur et clarté'전경, 로댕의 작품 'Le sommeil'(잠, 1894)과 브랑쿠시의 작품 'Le sommeil'(잠, 1908)이 함께 전시되어있다. 사진. 이소이 기자
전시장의 첫 섹션(Blancheur et clareté, 흼과 밝음)부터 두 번째(Aux sources d’un nouveau langage, 새로운 언어의 원천에서), 세 번째 섹션(Le travail du bois, 나무 작업)을 거쳐 네 번째 섹션(L’atelier, 아틀리에)까지의 여정은 영화의 잘 만들어놓은 예고편을 보는 느낌이다. 첫 섹션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섹션으로, 첫 번째 전시실은 대리석으로 만들어 놓은 하얀 작품들로 전시를 해 놓았으며, 두 번째 전시실은 브랑쿠시가 영감을 받은 작품(로댕, 고갱 등의 작품)들과 브랑쿠시의 작품을 나란히 전시해 놓았다. 이 섹션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브랑쿠시의 대표작 중 하나인 ‘La prière’(기도)로, 예고편의 초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La prière(기도), 1907, 사진. 이소이 기자
두 번째 섹션과 세 번째 섹션은 한 공간에 있는데, 공간의 왼쪽(두 번째 섹션)에는 브랑쿠시의 수집품을 연도순으로 나열하여 관객에게 아티스트의 취향과 관심사를 보여주며, 맞은 편의 세 번째 섹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무로 만든 작품들을 전시한다. 이 길의 끝, 네번 째 섹션에는 브랑쿠시의 아틀리에가 나오면서, 전시의 예고편이 끝나고 다섯 번째 섹션부터 본편이 시작된다. 미장센이라고 부를 수 정도로 과한 이번 전시의 세노그라피는 관객에 따라 취향이 갈릴 듯하다.
브랑쿠시의 아틀리에, 사진. 이소이 기자
◆ 프린세스 X(Princesse X)
전시 본편의 첫 작품은 피카소와 마티스가 극찬한 청동 조각 ‘프린세스 X’이다. 브랑쿠시는 원래 거울을 보는 긴 머리의 여성을 만들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성의 머리와 가슴만 만들고 보니, 작품의 모양이 애매하게 됐다. 그래서 ‘프린세스 X’는 이렇게 보면 남성의 성기같이 보이고, 저렇게 보면 추상적으로 조각해 놓은 여성의 모습같이 보인다. 이 작품은 외설 논란으로 1916년 Salon d’Antin(엉땅 살롱), 1920년 Salon des indépendants(살롱데장데펑덩 : 살롱에서 거절당한 아티스트들이 전시하기 위해 만든 살롱) 에서 거절당하며 유명세를 얻는다.
Princesse X, 1915-1916, 사진. 이소이 기자
◆ 비상
'일생동안 찾아 헤맨 건 비행의 본질뿐이다.' (브랑쿠시)
브랑쿠시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을 꼽으라면 아마도 ‘L’oiseau dans l’espace’(공간속의 새) 조각이 아닐까 싶다. 본 전시에서도 ‘공간 속의 새’ 작품들은 눈에 띈다. 30 년동안 아니 일생동안 브랑쿠시를 사로잡은 모티프이기 때문이다. 브랑쿠시는 새를 통해 자유로운 비상을 꿈꿨다. 무게감이 있는 재료(석고, 나무, 대리석)로 가볍고 우아한 새의 몸짓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정신적 탐구도 비상할 수 있다고 믿었던 듯하다. ‘공간 속 새’ 연작에서는 선의 우아함, 균형, 반들반들함 같은 미적인 표현으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느껴진다.
'L'oiseau dans l'espace'(공간속의 새) 조각들 전시전경, 사진. 이소이 기자
◆ 받침대
'받침대는 조각의 일부이다. 그렇지 않으면 받침대를 굳이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브랑쿠시)
브랑쿠시는 받침대의 역할을 강조하는데, 이를 통해 관객에게 중요한 역할을 주는 듯하다. 그는 거대한 받침대인 ‘Colonne sans fin’(끝없는 기둥)이란 작업을 할 정도로 받침대의 역할에 대해 깊이 사유하였다. 게다가 브랑쿠스가 받침대를 작업의 일부라고 생각했다면, 전시 공간도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작품이 놓일 전시 공간도 작품의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작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Colonne sans fin'(끝없는 기둥) 조각들 전시 전경, 사진. 이소이 기자
◆ 운동
'내 조각을 존중하지 말라. 내 조각을 사랑하고 조각과 놀아라.' (브랑쿠시)
브랑쿠시 작품을 감상할 때 어려운 점 중 하나는 때로는 작품의 정면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의 경우도 작품을 비스듬히 설치해 놓은 경우가 많았기에, 관객은 작품 주위를 돌 수밖에 없게 된다. 실제로 전시장에서 작품 주변을 돌면서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찾아 사진 찍는 관객을 많이 볼 수 있다. 게다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작품의 경우에는 관객이 작품 속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매 순간 바뀌는 작품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기에, 관객의 운동이 작품의 일부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브랑쿠시는 운동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공간 속의 새’ 연작은 운동 자체를 표현했으며, ‘프린세스 X’같은 작품은 작품 주변을 돌아다니는 관객들의 운동을 염두에 두었다. 운동에 대한 이런 관심은 돌아가는 청동 조각 작품인, ‘Léda’(레다)에서도 볼 수 있다. 관객의 운동 혹은 운동에 대한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고 전시를 보면, 전시가 다르게 보인다.
Léda, 1926, 청동 조각이 설치된 판이 돌아간다. 사진. 이소이 기자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과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브랑쿠시가 운동, 공간, 놀이를 강조했다면, 그건 관객에게 더 많은 해석의 자유를 남겨놓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시 초반의 세노그라피는 관객에게 더 많은 해석, 놀이의 자유보다는 일방적인 정보 전달의 효과를 더 강하게 준다. 관객은 본 전시로 들어갈수록 벽에 쓰여 있는 내용을 보고 더 많은 일방적인 내용을 접하게 되며 결국 그만큼 관객의 운동과 놀이가 제한된다. 퐁피두 센터의 취지 중 하나가 예술 교육이며, 그렇기에 전시마다 벽에다 설명을 적어놓는 건 이해하지만, 브랑쿠시의 의도에 따라 설명을 좀 줄였으면 어땠을까 혹은 적어도 전시 초반부의 미장센에 가까운 세노그라피를 최소화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