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공기도 상쾌한 어느 아침. 당신은 가벼운 운동복 차림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경쾌하게 녹색의 공원을 걷고 있다. 주변에는 산책을 나오거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이제 적당히 땀도 나고 신선한 풀 냄새가 코끝을 스치자 당신은 기분이 좋아진다. 발길을 멈추고 적당히 몸을 풀고 있을 때 낯선 누군가가 힐끔 힐끔 쳐다보는 기척이 있다. 의아스러워서 그 사람을 쳐다보니 슬쩍 시선을 피하다가 마침내 뭔가 결심을 했다는 표정으로 당신에게 다가온다. 그러더니 당신 앞에 서서 “혹시 지금 듣고 있는 노래가 찰리 푸스의 ‘See you again' 아닌가요?” 라고 묻는다. 당신은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밖으로 새어 나갔다고 생각 한다. 약간 미안한 마음에 상대가 이 노래를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왜 묻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일단 그렇다고 대답해준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이 인류학자라고 소개하면서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 오, 마이 갓. 내가 후기 구석기인이 멀쩡하게 살아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찰리 푸스의 노래를 듣는 장면을 보다니. 정말 놀라워요. 놀라워” 이 인간이 미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 당신은 빨리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지만 그는 쫓아오면서 계속 떠들어 댄다. “당신은 사 만 년 전에 살았던 구석기인이 틀림없어요. 척추의 꼿꼿함, 걷는 동작, 두상, 특히 얼굴 생김새. 완벽해요. 제 학위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혹시 가능하다면 찰스 밍거스의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를 들어 주시면 안 될까요? 호모 사피엔스라는 곡이 없어서 유감이지만 이 감동적인 순간에 어울릴 것 같아서요.” 이쯤 되면 당신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이 인류학자의 면상을 한 대 갈기고 싶어질 것이다.
후기 구석기인이라 불린 당신이 화가 난 이유는 아마도 당신의 지적 능력과 생김새에 대한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후기 구석기인들을 원시인이라 부르며 인간보다 훨씬 열등한 유인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비교 대상이 되는 것조차 싫어하며 닮았다고 하는 말을 조롱이나 놀림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물며 후기 구석기인과 동일하다고 불리는 것은 극심한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자. 학문적으로 과연 이 분노는 타당한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일까. 정말 후기 구석기인들은 유인원을 조금 벗어난 정도에 불과 했을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다윈을 호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후기 구석기인들과 다르다는 생각에는 약 사 만년이라는 엄청난 시간 동안 유전적 진화가 이루어 졌을 거라는 개념이 전제가 되어있다. 그들이 먼 조상쯤이라는 것은 알지만 우리와 같다고 하기엔 너무나 원시인 같다. 그래서 낯설다. 우리가 느끼는 진화의 속도감도 문제다. 다윈 덕분에 진화는 상식적인 일이 되어버렸고 마치 매 순간 일어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을 정작 다윈이 들었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 아마 그렇게 짧은 시간에는 가시적 변화가 있기 힘들다고 대답하지 않을까. 진화에 있어 사 만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긴 시간이 아니다. 약 40만 년 전에 생존했을 거라고 추정되는 피테칸트로푸스 에렉투스라면 당신의 분노는 정당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호모 사피엔스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인류의 진화는 백 만년 단위, 적어도 수 십 만년 단위가 아니면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고인류학자 헨리 오스본은 해부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에 속하는 크로마뇽인이 우리와 꼭 같은 존재이며 그들은 뛰어난 용사이자 사냥꾼이었고 화가였으며 조각가였다는 평가를 남겼다. 최근에 질 들뤽은 ‘선사시대의 식탁’에서 크로마뇽인과 현대인들이 유전적으로 비슷해서 우리의 식품에도 큰 변화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크로마뇽인과 다르게 지나친 단당류와 지방을 섭취하는 것이 현대 질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지적 능력, 생김새, 예술적 감수성, 소화 내장기관에 이르기까지 후기 구석기인들과 21세기 인간들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우리가 후기 구석기 시대에 가거나 후기 구석기인들이 현대에 와서 산다고 해도 별 탈 없이 적응해서 잘 살 수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사 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 취급을 당한 일에 대한 당신의 분노는 근거가 없어 허망하다.
3. 가부장적 남성성의 통념
1912년에 프로이트는 “여성은 남성과 다르므로.... 이해할 수 없고, 비밀이 많으며, 낯설다. 이 때문에 적대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저명한 학자의 말이라고 하기엔 참으로 어이없고 난처하다. 프로이트보다 앞선 19세기 중반에 나타난 신생 학문인 선사학에는 더 가부장적 모델이 투사되어 있다. 구석기 시대 남성은 항상 돌도끼 같은 무기를 들고 사냥을 하거나 전투를 하는 폭력적 역할을 맡고 있다. 같은 시대 여성은 식물 채집이나 가사 일을 하는 수동적 존재로 인식 된다. 권력이 강한 존재이므로 주술사도 당연히 남성이다. 동굴 벽화를 그린 예술가도 남성이다. 권력과 폭력, 멋진 일 모두 남성 차지다. 이 모든 것은 구석기시대는 가부장적이었다는 초기 학자들의 암묵적 합의가 이뤄낸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과 달리 구석기 사회의 폭력적 남성성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인류학자 프랑수아즈 에리티에는 “인류 진화의 역사에서 여성의 존재감이 거의 없는 것은 인류의 시작부터 ‘성에 따른 차별적 유의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마를렌 파투 마티스는 <파묻힌 여성>에서 이러한 가부장적 모델의 근거가 없음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남부 페시 메를 동굴 벽의 손자국이 여성의 것으로 판명되었고 따라서 모든 예술가나 주술사가 반드시 남성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엘리자베스 슈미트는 사 만 년 전 유럽은 모계사회라고 주장하며 권력 기반을 여성에게 넘겼다. 구석기 사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제시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기존 학설이 그저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언급한 것에 그쳤다면 이제는 실제 여성을 묘사 했다거나 매력적 여성의 표현이거나 여자 사제 또는 조상을 상징한다고 보는 학설들이 등장한 것이다. 영국 에딘버러 공학 대학의 연구진들은 라스코 동굴 황소의 방에 남겨진 그림들이 약 1만 5천 2백 년 전의 운석 충돌 사건을 묘사한 것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독일 슈타델 동굴에서 발견된 사자 인간 조각도 그 시대 사람들이 이미 황도 12궁 별자리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이러한 변화는 점진적이기는 하지만 구석기 시대 미술을 평가함에 있어 분명히 새로운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다만 현재까지의 구석기 시대의 유물에 대한 연구결과로는 어떠한 확정적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상태라는 점도 인정해야 있다. 기존 학설의 잘못된 점을 지적 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학설의 증거 역시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올 정도로 분명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만족할 만한 새로운 증거나 유물, 새로운 분석 기술 등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할 수 있는 한 우리의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말이다.
4. 다시 고전으로 - 열린 드라마
모든 것이 열려 있다. 동굴도 결론도 펼쳐져 있다. 우리가 그 사이 어디쯤 서있을 뿐이다. 구석기 시대는 드넓은 평지에 있었을 수많은 유물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물만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는 제한적이다. 이 한계를 넘기 위해 밀라노브스키는 토속지적 연구로 발길을 돌려보기도 했으나 지구의 기후 변화, 무리의 이주에 따른 환경 변화, 부족 간의 갈등, 천재지변 등을 고려한다면 미개 사회의 변화가 느리다고 해서 구석기 시대의 모습과 같다고 단정 짓기는 힘든 일이다.
이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시대가 그 존재 자체로 희망이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막다른 지경에 이르렀을 때다. 중세의 어둠이 끝난 유럽 사회가 갈 길을 잃었을 때 르네상스를 외치며 그리스-로마시대로 돌아가고자 했다. 니체 역시 한계에 도달한 유럽 문화를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고전연구를 제시했었다. 폴 고갱이나 앙리 마티스도 자신의 화풍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때 택한 길이 문명을 벗어나 원시성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를 보고나서 인류는 2만년동안 나아진 게 없고 현대미술이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탄식했을 정도다. 원시는 시원을 의미한다. 처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가 보는 일. 전락을 예감하는 자에겐 동굴의 구원이 필요한 법. 21세기 문명의 해체되어 흩어지기 전에 구석기의 열린 동굴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우리를 들어오라고 부르고 있음이다. 흰목 대머리 독수리의 노뼈로 만든 피리가 독일 홀레펠스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그 당시 그 연주를 들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샘 스미스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복장으로 ‘I'm not the only one'을 부른다고 할 때 현재의 보수층들이 느끼는 것보다 그들이 더 위화감 없이 들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