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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소프의 서양미술사 답청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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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 미술 2. 통념에 대한 이의제기

1956년 6월, 트럭 운전사 출신의 한 젊은이가 NBC 텔레비전에 출연해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흔들며 노래하자 당시 TV를 보던 미국의 젊은 세대들은 입을 벌리고 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은 정확히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지만 금지된 미지의 세계로의 초대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동시에 같이 TV를 보던 기성세대들도 충격을 받았으나 이유는 달랐다. 지난 역사 이후의 시기 동안 권력자들이 그렇게 없애려고 노력하고 이제 거의 박멸했다고 생각한 디오니소스 혹은 바쿠스 축제의 초대장이 공표되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젊은 세대들이 자신들의 손바닥에서 벗어날까 두려워진 권력자들은 그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전전긍긍하며 사회 불안을 이유로 온갖 방해와 금지를 남용한 덕분에 엘비스는 짧은 광란적 인기의 시기를 마감하고 군대로 떠나야했다.      

 

 엘비스는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듯 다리 근육을 감싸고 남아 있는 바지 천이 리듬에 맞춰 흔들리도록 하는 (바지 주머니 속에 콜라병을 넣고 흔들었다는 소문도 있다) 폭발적 퍼포먼스로 유명한데 이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접한 흑인 교회음악에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 미국 흑인들은 사회적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에서 오는 울분과 좌절을 음악을 이용해 온 몸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교회나 재즈바에서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면 모인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고향인 아프리카에서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고 떨다가 전율을 느끼면서 엑스터시에 도달하곤 했다. 역사적 맥락을 모르는 단순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행위는 마치 저속한 광기의 원시적 집단 행위로 생각되기 쉽다. 흔히 우리가 신내림이나 신들림이라고 말하는 상당히 거부감이드는 주술적 광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참가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 그 동안 쌓인 감정을 분출하고 심리적 안정을 되찾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동시에 신바람 또는 신난다는 의미의 삶의 활력소를 찾게 된다. 한마디로 사는 맛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번이라도 이 행사에 참가해 본 사람이라면 그 환희를 잊지 못하고 또 참가하게 된다. 이러한 모임은 자연스럽게 번져나가게 되고 참가 인원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되는 바 사회적 동요를 두려워했던 사제나 위정자들은 최대한 이 현상을 억제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러한 축제를 야만적, 저속함, 광란적 퇴폐성을 가진 반사회적 행위로 규정하고 금지해왔다.

 

엘비스 프레슬리  ©️ Wikipedia
엘비스 프레슬리  ©️ Wikipedia

 

 디오니소스 축제가 금지된 또 다른 이유는 자연스럽게 신이 들고 나는 과정을 경험한 사람들의 직관이 발달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신난다는 말은 쉽게 사용하지만 신든다는 말은 도통 사용하지 않고 있고 사용한다고 해도 굉장히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기독교에서조차 신든다는 의미로 마귀에 들렸다는 말을 사용하는데 보통 사람들이 이 용어에 공포감을 가진다해도 전혀 놀랍지 않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사람이 음식을 먹고 배설하는 것과 같이 일종의 정신적 양식의 INPUT과 OUTPUT의 과정 역시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이 INPUT 작용을 관상이라고 하였다. 예수님도 하나님을 관상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성리학에서는 미발 함양이라고 하여 정신적 에너지가 축적되는 과정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주자의 근사록을 중심으로 하는 수양론은 경의 공부를 중요시하였고 정신적 INPUT 과정을 미발의 경이라 하고 OUTPUT 과정을 이발의 경이라고 하였다. 미발 함양을 잘 수양하면 직관이 발달하고 이발 성찰을 잘 닦으면 분석과 실천력이 높아진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정신적 에너지의 들고 남을 수양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 수행과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굉장히 낯설고 두려운 일이 된 배경에는 이른바 탐욕스러운 사제나 종교인들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정권 유지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종교의 신이 피지배 계급의 정신적 INPUT 과정을 지배하기를 바랐고 목표는 자신들이 신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며 신과 인간 사이에 에이전시 회사를 차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중개 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쏠쏠하게 면죄부도 팔면서 막대한 이권과 권력을 챙겨왔다. 따라서 자신들이 관여하지 못하는 종교의 정신적 INPUT 과정은 모두 이단과 사이비 종교라고 몰아세우며 주술적이라는 주홍글씨를 붙여주었다. 역사적으로 오랜 기간 동안 이러한 강압적 세뇌가 고착화되자 보통 사람들에게 대리인 없이 신든다의 과정은 주술적이라 무섭고 두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대리인이 있으면 성령이 강림하는 것이고 없으면 마귀에 들린다는 헛소리가 만연하자 니체가 드디어 신은 죽었다고 선포할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 축제 참가자들은 니체가 아니어도 사제나 종교인이라는 인간들이 나서서 자연스러운 접신의 경지를 통제하고 간섭한다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직관이 발달한 그들은 비록 문자를 모르는 무식쟁이였지만 똑똑한 사제나 종교인들이 나불대는 헛소리를 척보고 알아챘으며 뒤돌아서서 비웃었다. 대리인들 입장에서는 이 무식하고 고집 세고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족속들을 다루는데 골치가 아팠으며 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면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다는 두려움이 커지자 신의 대리인답게 비인간적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 축제가 역사에서 지워져버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바로 디오니소스 축제가 왜 그토록 야만적이고 기이한 일로 이해되고 과거에 사람들이 열광했던 이유를 모르게 된 사연이다.

 

세잔 '바쿠스제'  ©️ 네이버 지식백과
세잔 '바쿠스제'  ©️ 네이버 지식백과

 

  지금까지 선사시대의 미술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주술적이란 말에서 생기기 쉬운 오해를 풀기 위함이다. 주술이라는 말처럼 교묘한 의도를 가지며 작위적이고 제대로 된 뜻도 모르면서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용어도 드물다. 우선 주술이라는 말은 아주 나쁜 마법사나 악마가 우리에게 해를 가할 때 사용하는 술법이라는 느낌을 주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강력한 정신적 힘을 빌려 상대에게 해를 가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쓰인다. 아주 나쁜 존재가 악마의 힘을 빌려 죄를 짓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술의 사전적 의미는 협의로 보자면 불행이나 재해를 막으려고 주문을 외거나 술법을 부리는 일이고 광의로 보면 초자연적 존재의 힘을 빌려 길흉을 점치고 화복을 비는 일이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다소 낯선 의미는 복을 비는 일도 주술이라는 뜻이다. 개인적인 구복 행위가 주술이라면 종교인이 자신의 신에게 복을 비는 일은 주술이 아닌가하는 점이다. 만약 종교인의 구복 행위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면 여기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종교와 이른바 잡신의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본다. 단순히 많은 사람이 믿느냐 소수의 사람이 믿느냐의 문제라면 이는 다수의 결정은 참이라고 보는 단순 오류에 빠진 것이다. 물론 이런 단순 오류에 빠지는 사람은 없겠지만(?) 소수의 사람들이 믿는다고 해서 복을 비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착한 신을 잡신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다수와 소수의 차이로 잡신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주술을 협의의 의미로 보아 잡신을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악마라고 보는 관점에는 찬성하기 쉽다. 옛날 어머니들이 정한수를 떠놓고 빌었던 신은 비록 믿는 사람이 적었지만 착하니까 잡신이 아니라고 하자. 일본 신사에 있는 수많은 신들은 잡신인가 아닌가. 일본인 관점에서는 아니지만 한국인 관점에서는 신이 된 전범자들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무당들이 모시는 신은 잡신인가 아닌가. 그들이 직접 인간에게 나쁜 행위를 하는가? 그 증거를 제시 할 수 있는가? 아니면 일부 무당들이 나쁜 짓을 하는가? 무당들의 해악이 문제라서 잡신이라면 사회에서 인정되는 종교의 사제들이 저지르는 해악으로 인해 그 종교의 신도 잡신이 되는가? 신 자체로 잡신을 결정하기도 어렵고 대리인들의 윤리적 행위로 결정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사회적 함의는 존재하는 것이어서 주술의 의미는 변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인정하기 싫지만 주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 다수를 무조건 신봉하는 민주주의의 오류에 빠져있는 것 같다.

   

 레비스트로스는 ‘슬픈 열대’와‘야생의 사고’등을 통해 원시부족의 문화가 유치하고 미개한 수준에 불과하다는 서양 중심의 편견을 반박하고 오히려 매우 체계적이고 수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었다. 그를 기점으로 앙드레 르루아구랑은 동굴 벽화를 주술적 관점에서 종교적 관점으로 파악하기 시작했고 동굴 유물들을 분석한 누적된 데이터는 초기 이론에 의문을 일으켰다. 델포르트는 선사시대 집 자리 내부에서 발견되는 동물 뼈가 당시 지역 동물상의 절대적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라스코 동굴의 1500개 그림중에서 순록은 단 1개이지만 잡아먹은 동물은 대부분 순록이었다. 알타미라 동굴은 들소 그림이었지만 그들은 사슴을 잡아먹었다. 루피냑 동굴에는 155개의 매머드가 그려져 있지만 크로마뇽인들은 매머드를 거의 사냥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로 소비했던 순록이나 물고기 및 많은 식물들에 대한 예술적 표현은 거의 없다.  

 

 이제 주술이라는 용어를 선사 시대 미술의 특징으로 제시하기는 어렵게 보인다. 우선 벽화에 그려진 동물들이 크로마뇽인들의 사냥감이 아니었다. 대상이 없는데 사냥이 잘되라고 비는 주술이 성립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의미로서의 협의의 주술은 선사시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든 초월적 존재의 힘을 빌려 악을 행하려는 자들은 항상 있어왔다. 현대에는 정성껏 만든 제웅에 수없이 바늘을 찌러봤자 상대가 가려워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신이 된 인터넷에서 혐오하는 상대에게 악플을 다느라 바쁘다. 이것은 당신에게 주술적 행위인가 종교적 행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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