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투명한 분홍, 분홍빛 보라, 보랏빛 분홍, 약간의 오렌지 그리고 아주 가끔 파랑과 노랑. 꽤 오래전부터 보아 온 윤새롬 작가의 작품은 늘 그런 이미지였다. 작가는 언제나 작품에 대해 어린 시절 필리핀에서 본 노을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아주 간결한 설명만을 덧붙인다. 얼마나 행복한 기억이기에 그렇게 확고한 테마로 한결같이 작업을 이어올 수 있었는지 궁금해서 필리핀의 노을 이미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작가가 왜 아크릴을 사용했는지, 왜 굳이 많은 말을 얹지 않았는지를 상당 부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풍경은 현지에 오래 산 사람이 “필리핀에서는 노을이 아름답지 않은 날을 찾기가 어렵다”라고 설명할 만큼, 필리핀은 노을 맛집이라 불러도 될 만큼 아름다웠고 작가의 작품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물론 노을을 보고 남은 기억의 조각들이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별 B612에서 노을을 하루에 마흔네 번이나 보았다는 어린 왕자가 남긴 말처럼. “마음이 아주 슬플 때는 지는 해의 모습이 정말 좋아……”
#2 하늘의 색이 서서히 변해가는 광학 현상은 무척 신비로운 광경이지만 그 과학적 원리를 알고 나면 환상이 좀 깨지기는 한다. 햇빛이 수증기나 미세먼지와 부딪히면서 생기는 노을이 아름답다는 건 그만큼 빛의 산란이 많다는 의미이고, 그건 바로 대기 속 오염물질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하면 고기압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을 때 선명한 노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고기압이 대기의 오염물질을 지표 근처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생기면 서쪽 하늘에 먼지가 많다는 것을 뜻하며, 동쪽 하늘에 아침노을이 붉게 물들면 이미 고기압은 동쪽으로 지나가고 서쪽의 저기압이 다가와 비가 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저녁노을은 맑음, 아침노을은 비’라는 옛 속담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공기가 오염되어 있을수록 우리는 더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고 맑을 날씨를 기대할 수 있다니, 노을이 아름답다고 마냥 좋아해도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3 화가 모네는 <인상-해돋이>에서 대기의 변화와 노을의 한 순간을 담기 위해 빠른 붓 놀림으로 변화를 포착한 반면, 존 싱어 사전트는 철저한 계산과 연출을 바탕으로 초저녁 노을의 색을 표현하기 위해 하루 10분씩 10달에 걸쳐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를 완성했다. 김광균은 자신의 시를 통해 노을을 ‘보랏빛 색지 위에 마구 칠한 한 다발 장미’라고 표현했고, 나태주는 '저녁노을 붉은 하늘 누군가 할퀸 자국'이라 했다.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노을은 장엄하고 엄숙함을 강조하는 도구로 인식되어 있으나 뭉크의 <절규> 속 노을은 핏빛으로 물들어 인물의 불안을 강조하는 배경 도구로 기능한다. 내가 본 윤새롬 작가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양면성을 전천후 활용하는 사람이다. 작품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그는 예술가로서의 감성적인 면을 드러내며 단위로 환산하거나 의미를 특정 짓기 어려운 어휘를 주로 사용한다. 반면 제작 공정에 대한 인터뷰에서는 테크니션으로서의 끈기와 집념, 치밀함을 아낌없이 발휘한다. 열대계절풍기후 군도 국가의 초저녁 시간의 온도, 따스하면서도 서늘한 노을의 매력, 어떻게 이렇게까지 섬세할 수 있을까 싶은 아크릴의 마감과 작품의 완성도는 이러한 작가의 성향에 기인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