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글 - '거름 내는 소리'
죽음이 있기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
생명의 마지막 모습이라 할 수 있는 유기물의 부패는 또 다른 생명을 길러내는 비옥한 거름이 된다. 어쩌면 화산 분출에 의한 섬이라는 제주의 지형 자체가 생성과 소멸의 순환의 고리의 증거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팬데믹과 기후위기 등 개인의 삶과 지구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 무시무시한 단어들은 더이상 텍스트로만 존재하는 위험이 아니다. 이러한 위기를 대처하는 방식은 ‘더 나은 것’을 위한 또 다른 소비나 생산보다는 자연의 순환고리, 즉 생성과 소멸의 순환에 대한 인식과 성찰에서 시작될 것이다.
거름 내는 소리’, ‘돗통시’ 등 제주 전통에는 이러한 생태 순환 정신이 배어 있다.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거름 내는 소리>는 제주 전통 노동요로서 과거 거름을 논밭에 실어 내거나 펼쳐 내면서 부르는 농요의 제목이기도 하다. 동물과 인간의 배설물, 구들의 재, 쌀겨, 깻묵 등 일상의 하찮은 것들은 거름이 되어 토지를 정화한다. 사람들은 노래를 주고 받으며 바지런히 몸을 놀려 땅을 고르고 거름을 만들어 땅으로 돌려보낸다.
전시의 참여작가 박가연, 신예선, 이다슬, 이한나는 주목받지 못하는 하찮은 생명이나 대상에 주목하여 생성하고 소멸하는 일시적 존재들을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하기 위한 작업을 수행한다. 유한한 존재를 애도하며 명주실이나 흙과 같이 자연의 재료를 잠시 빌리고, 그것들로 제작한 작품이 스러져 없어지는 것을 억지로 붙잡아 두거나 과하게 기념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작가의 역할이란 그러한 사라짐과 덧없음을 인정하고, 그것들이 다시 거름으로 돌아가기를 도와주는 것뿐이다. 수행 속에 들려오는 작가들의 목소리는 ‘거름 내는 소리’이다.
죽음과 소멸의 기억과 감각을 포착하고, 생명의 순환을 긍정하는 4명의 작가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환경위기의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겸허하고 반성적 태도에 관해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주요 작품 (사진=산지천갤러리)
● 박가연 - ‘죽음을 통해 생을 바라보고, 생을 통해 죽음을 인식하길 바라는’
삶과 죽음에 대한 고민을 어릴 적 듣고 경험한 생활양식과 전통문화에서 영감을 얻어 풀어내기 시작했다. 작가는 우리의 식탁에서 흔히 발견되는 생선의 머리나, 냉이, 버섯 등을 사용해 바니타스 정물을 연상시키는 영상과 함께 애도와 죽음에 관한 메시지를 공간으로 확장시키는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한편 <그림자의 그림자>는 2018년 개인전에 선보였던 작품을 재창안한 작품이다. 회전하는 조명을 통해 여러 오브제를 비추던 작품의 주요 메카닉은 전시 환경에 의한 자연스러운 움직임의 방식으로 대체되었다. 가느다란 낚시줄에 매달린 뱀의 허물은 공기의 움직임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고, 자신을 비추는 빛에 의해 그림자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작가는 ‘존재—허물—그림자’의 관계를 통해 삶과 순환에 대한 메시지를 시각화함으로써 ‘죽음을 통해 생을 바라보고, 생을 통해 죽음을 인식하길 바라는’ 기존 주제 의식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