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시선이 닿은 곳이 있다. 어느 날은 소요하는 바람결의 나무들을. 어떤 날은 새벽 녘 흩날리는 눈을 그리고 또 어떤 날은 석양의 눈부신 하늘에 시선이 닿는다. 나는 천천히 <자기만의 여행> 속 소녀의 시선을 따라가 본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이 그림 밖에 있을지라도. 나는 그림 너머, 시선 너머 풍경들을 상상한다.” - 작가노트 중에서-
안소영 작가 개인전 '자기만의 여행_시선이 닿는 곳'전이 11월 10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 자작나무(Gallery White Birch)에서 열린다.
안소영의 그림에는 별과 달, 나무와 같은 자연이 등장한다. 인간의 시간보다 긴 세월을 살아낸 대상들과 조우함으로써 ‘현재 나의 좌표’를 그려내기 위함이다. 자연의 피조물로 인간이 들어갔을 때 자유를 느낀다는 작가는 경쟁적인 도시의 삶보다 오랜 시간 견뎌낸 자연의 삶이 더 많은 희망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먼지처럼 부유(浮遊)해도 요구하지 않는 편안함은 오랜 시간을 견뎌낸 나무의 시간과 닿아 있다. 자연이 둥지가 된 풍경은 그래서 여백을 강조한다.
자작나무로 환원된 <응시 시리즈> 속에는 소녀가 자연을 관조하는 프레임이 등장한다. 밤 속의 낮과 밤 속의 석양이 공존하는 그림에서는 현재를 만족하지 못하고 과거를 추억하는 우리의 현실과 만날 수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꿈과 현실의 이중변주 속에서 아픔을 이겨내고 현실을 가치 있게 의미 짓는 가운데 살아야 할 자연과 같은 존재라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실제 자작나무를 보노라면 세로로 연결된 레이어들이 다른 세계(가상과 꿈)와 만나는 경험들을 보여주는데, <매트릭스>나 <인셉션> 같은 영화 속 스토리들처럼 작가는 이상향의 세계로 통하는 또 하나의 문을 그려내고 있는지 모른다. 또 하나의 상징코드는 바로 ‘나비’이다. 정글 같은 현실에 던져진 오늘의 불안을 피하는 방식은 그림 같은 상상을 하는 것이다. “내가 나비가 된다면, 내가 작품 속의 소녀가 된다면?” 작가에게 상상하는 시간은 그림과 조우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017년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안소영 작가는 홍대 판화과 출신이다.
판화가 가진 평면적 속성을 페인팅으로 옮겨낸 듯 완성도 있는 작품 구성과 현실해석은 체계적이면서도 아름답다. 특히 색에 대한 타고난 해석은 ‘페인팅을 페인팅답게’ 그리는 면모와 닿아 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끼가 무엇일까. 내가 정말 작가다울까?”를 고민해 왔다고 한다.
안소영 작가는 소박하고 작은 가치조차 의미 짓는 성격 탓에, 외적 대상을 드러내기보다 내면의 이야기들을 소담하게 그려내는 ‘나만의 여행’이란 주제를 모티브로 삼는다. 단 한 번도 붓을 놓았던 적이 없던 이유도 그려야 한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출판사에서 의뢰한 단행본 표지를 그리는가 하면, 어느 순간 밀려온 실존에 대한 고민들을 손으로 풀어낸 적이 많았다고 한다.
안 작가는 결혼과 두 번의 출산, 아내와 딸이라는 의무 이전에 ‘나로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들은 살랑거리는 공기가 되어 무심코 떠나는 나만의 여행을 계획하게 한다.
이전 개인전을 통해 많은 이들의 러브콜을 받은 작가는 “첫 여행(개인전)이 무작정 설레고 좋은 감성이었다면, 여행 중에 만나는 기쁨과 슬픔들은 힘겨운 삶을 담아낸 새로운 여정”이라고 말한다. 작가로의 삶을 ‘자신만의 여행’이라고 명명한 작가는 어느덧 혼자가 아닌 작품을 사랑하는 모두를 위한 ‘동행(同行)’을 시작한다.
안소영 작가는 평범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작품들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거대서사나 외적 관종을 지향하는 기존 작가들의 냉소적 성찰과 풍자마저 자기고백적 서사로 전환시키는 작가는 긍정적 치유와 명상을 통해 “나의 관심을 사회적 관심으로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한다.
노마드(Nomad)적 삶, 시공간의 제약 없이 인터넷에 접속하여 필요한 정보를 찾고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오늘의 일상 속에서 안소영은 디지털 유목민이 아닌, ‘자기 안의 유목민’을 꿈꾼다.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언(Marshall Mcluhan, 1911∼1980)의 ‘디지털’ 세상에 대한 30년 전 예언을,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의 『차이와 반복(Difference and Repetition)』(1968)에 나오는 “노마디(자유롭고 창조적인 인간형, 이동하는 자만 살아남는다)”의 속성으로 옮긴 느낌의 작품을 선보인다.
작가의 시선을 좇다보면 자연의 한가운데서, 편안하고 안전한 나만의 세계가 확장되는 영감을 얻는다.
안소영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모티브의 기본은 자연과 소녀이다.
분주한 일상을 멈추고 작품을 응시하면, 소녀와 잠시 대화를 하는 나누는 착각에 빠진다. 고요하면서도 차분한 색감 속에서 소녀는 마치 작가의 아바타가 된 것처럼, 관찰자가 되어 거꾸로 우리를 응시한다.
작품 속 시선이 닿는 곳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여행의 길이고 그림은 곧 우리 삶의 나침반이 된다. 작가의 그림은 한편의 아름다운 시와 같다. 그래서 명명된 <자기만의 여행>은 홀로 어딘가를 향해 떠나는 여성의 자기독백적 풍경화의 형식을 취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소녀의 이미지는 어쩌면 우리의 과거이거나 어딘가에서 만났던 마음 따뜻한 감성의 의인화일지 모른다.
시공간을 초월해 상상과 희망의 모티브를 새겨주는 안소영의 작품구성은 크게 3부작으로 구성된다. <자기만의 여행>은 소녀가 있는 풍경의 모티브를, <내가 너에게 갈게>는 소녀의 바람이 담긴 확장적 시각을, 소녀의 시선을 담은 <응시>는 여행에서 깨달음을 얻은 소녀의 미래를 담은 듯하다. 작가는 여행에서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이미지 안에 투영한다. 안 작가는 늘 즐거울 수 없는 여행의 고단함과 슬픔, 그리움 등을 여행 3부작을 통해 구현해낸다.
이번 전시에서 발표하는 신작 <안식처 시리즈>는 인물이 배제된 풍경들과 어디선가 봤음직한 확대된 인물들이 대비되듯 그려진다.
그림의 사이즈가 2배 가까이 커지면서 주인공은 자연에서 인물로 전환된다. 영화의 와이드 샷과 같은 잔상들을 보여준 이유 역시 누구나 동화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기 위해서다. 소녀가 손에 쥔 대상들도 책·휴대폰·전등처럼 방향을 지시하는 여행도구들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작가는 제목의 스토리텔링을 통해 다양한 상징코드를 숨겨 둔다.
<자기만의 여행> 뒤에 붙은 #4 #9같은 숫자들은 계절 혹은 달을 상징한다. 한 여성이 우연히 떠난 1년간의 여행은 ‘겨울-봄-여름-가을-겨울’(컴백홈)로 돌아오는 자전적 스토리텔링과 같다. <동이트기 전에>는 자작나무 사이를 걷는 겨울의 여성이 등장한다. 화면 밖을 바라보는 여성의 응시는 이상향 혹은 동이 트는 느낌 등, 긍정적인 세상을 보는 가능성의 힘을 담았다.
이전 작품이 풍경을 중심으로 그렸다면, 이번 전시는 작품의 시선과 관람객이 조우하는 순환적 느낌을 “내가 너를 보고, 내 자신이 작품의 속의 나이기를” 바라는 응시의 시선을 담는다.
<내가 너에게 갈게>(의자그림)는 내가 나 자신에게 가는 과정을 담는다. 처음에는 나에게 집중한 시간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욕구가 해소된 이후 어느 누군가를 위한 자리를 그리고 싶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해가 지기 전에>와 <동이트기 전에>는 한겨울의 석양과 노을을 보며 새로운 희망을 다짐하는 시간을 담았다. 그리고 싶다는 의지, 안소영의 그림 안에는 바람이 분다. 마치 자연이 인격같이 느껴지는 그림들은 힘들 때 숨결을 불어넣어주는 치유(힐링)의 바람과 같다.
안소영 작가의 다음 여행지는 언젠가 함께할 스스로의 미래가 아닐까. 누군가와의 관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래서 우리는 작가의 다음 여행지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