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이 주력하는 판화는 검 프린트(gum print)다. 검 프린트는 19세기 중엽의 초기 사진기법이다. 초기의 사진술은 그 이전의 전통적인 판화를 닮으려고 했는데, 검 프린트에서 그 흔적이 농후하게 보인다. 검 프린트는 사진, 페인팅, 판화 이 셋의 DNA를 공유하고 있다...(중략)
이 모든 과정에 개입하는 것은 빛과 그림자다. 빛과 그림자는 그의 작업의 중요한 도구이자 동시에 주제라고 할 수가 있다. 작품 속의 나무가 비록 소극적이나마 색채를 띠고는 있지만 그림자(shadow)의 기미가 강하게 보임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림자이면서도 명암이 분명한 노골적인 그림자는 아니다. 이는 작업이라는 장소성을 그늘(shade)이라는 인위적 장치 속으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늘 속의 그림자는 그림자를 만든 원래의 사물과는 물리적으로 심리적으로도 동떨어진 지경의, 아트라는 인위의 지경에서 은근하게 돋아나는 낯선 그림자다.
그 그림자는 나무와 숲 전체의 충실한 전사가 아니다. 여러 겹의 막을 통과하면서 간결한 조형적 질서로 재구성된 그림자다. 강렬한 햇볕 아래 선 자연 속의 나무라는 노골적인 상황이 빚어내는 그림자가 아니라 그 나무들을 그늘의 상태로 끌어낸 다음 부드럽고 섬세한 그라데이션의 빛과 그림자를 인화의 세척과정 중 물 속에서 깨워낸다. 물에 푹 담긴 지지체의 도포면에서 경화가 되지 않는 수채화물감과 아라비아 고무는 드디어 풀어져 나가며 빛을 뿜어낸다. 종교적 침례(浸禮)에 비견할만하다.
그의 판화 속의 빛과 그림자는 이러한 침례과정을 거친 이미지들이다. 필름의 현상(現像)과 아라비아 고무와 수채화물감의 감광에서 안료라는 물성의 현상(現象, 상의 드러남, phenomenon) 속에서 태어난 빛이다. 이데아에서 검 프린트까지 여러 겹의 막을 거쳐 진행된 과정의 끝은 결국 빛의 탄생이다. 그의 작품 속 나무는 선이 없는 대신 빛의 껍질로 뒤덮였다.
작가의 심상 속에서 그 빛은 영원을 희구하는 빛이다. 이데아와 현상 사이의 막, 현상과 조형 사이의 막 등 여러 겹의 막들을 다 헤치고 원래의 나무(tree)로 나아가려 하는 빛이다. 평론가 황인.
이곳과 저곳을 나누는 ‘막’(幕)
나는 작업을 통해 ‘명징성(明徵性-clarity)과 모호함(模糊-ambiguity) 사이의 어느 지점’을 추적한다. 예를 들어 스기모토 히로시(杉本博司-Hiroshi Sugimoto)는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임계 초점면을 조정하여 세잔이 그러했던 것처럼 영원한 사과를 포착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다시 말해 스기모토 히로시는 수많은 개개의 사물과 풍광으로부터 일종의 이데아를 추출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나 또한 스기모토 히로시, 세잔과 유사한 방향성을 추구한다. 내가 표방하는 명징성은 스기모토 히로시가 마주했던 지금 눈 앞에 있는 풍경과 사물이다. 이는 믿을 만한 것, 확실한 것,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현실의 명징성은 영원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모호함, 혹은 ‘불가시성’(不可視性-Invisibility)은 믿어야만 하는 것, 확신할 수 없는 것, 알 수 없음을 내포하지만, 가시성과 불가시성을 나누는 임계점을 통과하면 영원성을 담보하는 어느 지점으로의 도약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나는 이 임계점을 일종의 ‘막’(幕-membrane)으로 가정하고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듯한 이미지를 끊임없이 추적한다.
우리 인류는 모든 것에 대해 답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를 전적인 무지(無知)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부분적이나마 어떤 것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다. 나는 이 앎의 문제를 시각의 문제로 확장시킨다. 즉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해 안다’ 는 명제를 ‘우리가 모든 것을 또렷이 볼 수는 없으나 우리는 어떤 것을 볼 수 있다’ 는 개념이다. 따라서 나는 명징한 표현보다 모호하거나 빛에 의해 산란되는 형상. 혹은 명순응(明順應, light adaption)의 순간과 같은 빛에 의한 형상의 퍼짐에 주목한다. 이것은 볼 수 있는 것과 보지 못하는 양극단의 어느 지점을 점유한다. 이것이 인간의 진실한 위상이 아닐까 한다. 2022년 작가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