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찬 | 나의 작업은 사회와 스스로의 관계에서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를 조각으로 다루면서 진행된다. 이는 개인적인 행위를 표현하는 것과 외부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과정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뉜다. 이러한 행동과 신체적 경험을 결합해서 표현하고 내면에서 느끼는 감정을 드러내게 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모습과 달리 외부에서 보이는 모습은 사적인 모습이 아니라 편집된 모습이다. 사적인 모습이 외부로 표출될 때 변하는 과정을 조각의 방법론으로 실현시키는 것에 관심이 있다. 남에게 보여지지 않는 개인적인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며 사적인 모습이 사회의 관계에 따라 사회에 드러내는 것의 과정을 편집과 조작을 통해 조각으로 드러낸다. 이 사이에서의 조각은 해체와 재조합을 통해 더 변형되고 합쳐진 조각의 모습을 하기도 하고 그러지않기도 한다.
나의 군대 시절 철책 밖에는 외딴 바위섬이 하나 있었다. 철책 밖에 있었는지라 그곳은 나에게는 자유로운 장소이며 한번쯤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면 그들은 관심없어 하거나 내가 느낀 바위섬과는 다른 바위섬을 떠올린다. 나에게는 특별한 바위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생각과 관심있게 봐줬으면 하는 생각에서 바위섬을 호감으로 보이는 편집과 조작을 진행하였다. 호감을 위한 과정은 개인의 경험속에서 바라본 바위섬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편집과 조작의 방법을 사용하여 조각을 하였다. 하트, 앵클, 철사로 만든 후광 등이 요소들 인데 이것들을 바위섬의 이미지와 함께 붙여 어떻게 하면 호감을 위한 바위섬이 될 수 있을까라는 과정을 조각으로 다루어보았다. 하트는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앵클은 바위섬이 높게 보일 수 있는 구조물로, 철봉으로 만든 후광은 중세 기독교 회화 속 성인의 아우라를 표현했다. 이 중 철봉으로 만든 후광은 평면의 회화 표현을 조각에서의 표현으로 변형시켜 정면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표현을 하였다.
박은지|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반려동물이라는 명칭 속엔 이들을 장난감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보는 의미가 담겨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반려동물 산업은 커져가며 매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동물의 수도 늘어가고 있다. 인간의 유희로 만들어진 동물의 대부분은 유기되거나 버려져 죽는다. 죽어가는 동물을 보며 인간은 아직도 그들을 생명이 아닌 장난감, 장식품과 같은 물건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장난감은 상품화된 플라스틱 소재로 만들어진 놀잇감이다. 유행에 따라 새로운 것에 의해 교체되고 오래된 것들은 버려져 폐기된다. 펫숍에 납품되는 동물들은 번식장이라고 불리는 불법적인 공간에서 강제교배와 출산을 통해 만들어진다. 공장의 물건처럼 계획되고 생산되는 펫숍의 동물들은 유행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이와 같은 현상은 미디어 속 유행하는 동물들의 시작과 끝이, 한철의 장난감과 닮아있음을 보여준다.
나의 작품 속 동물들은 배아 형태로 존재한다. 모든 생명는 세포에서 시작된다. 초기에 일률적이었던 모습의 세포는 수많은 세포분열을 지나 하나의 개체로써 세상에 나타난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엔 “배아”라고 불리는 단계가 있다. 배아란, 하나의 개체를 알아 볼 수 있는 태아 상태의 전 단계를 뜻한다. 식물과 달리 동물의 배아 형태는 비슷하여 이 단계에서는 종을 쉽게 알아 볼 수 없다. 이렇듯 세포에서 시작되어 세상에 날 때 까지 우리는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
“A급 분양합니다”를 보면 하얀색 진열대 위에 장식된 유리병이 올려있다. 그 속엔 어떤 생명체인지 모를 배아가 들어있다. 작품 속 배아는 우리가 흔히 반려동물이라고 불르는 개, 고양이, 설치류의 배아와 인간의 배아가 순서없이 뒤섞여 배치되어 존재한다. 장식된 유리병에 있는 배아가 어떤 생명체인지 우리는 쉽게 구분할 수 없다. 뒤섞여 진열되어 바코드가 찍혀있는 유리병 속의 배아들은 판매되기를 기다리는 펫숍의 작고 어린 상품과 같다. 진열대 뒤엔 그들이 만들어진 곳의 모습이 흐릿하게 비춰진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판매되기 위해 만들어진 시각적인 정보만 보고 판단하고 추측할 뿐이다. 이익을 위해 생산된 이들은 판매를 위한 깨끗한 모습으로 진열되어 우리를 마주하고 있다.
박현철 | 나의 조형언어는 형태만 존재하고 전하는 메시지는 없다. 보고 느끼고 보이는 것이 맞다. 판단하지 말고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라 그대가 맞다, 그리고 옳다.
지금까지 먹어치운 시각 정보를 토할 뿐이다. 단순 시각적 흥미만을 추구한다. 있는 그대로이다.
이은정 | 정신없이 바쁜 일상 속에서 성실한 하루를 보내는 것 뿐, 오늘 하루도 공허하다. 주체를 잃어 가는 시간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 잡힌채 찬찬히 삶을 들여다 본다. 나의 취향과 수많은 고민 속에 내가 없는 나의 삶은 이미 반복된 어제와 오늘이다. 어른의 무게로 성장한 모습들- 바라지도 않았던 기대에 짓눌려 쉼없이 떠오르는 낯선 생각의 덩어리들- 이 덩어리들의 주체는 알 수 없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고 이내 뒤엉켜 붙어 ‘괴물 - 모즈비’가 된다. 머릿 속에 촘촘하게 자리잡은 생각들은 찰나의 쉼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 불쑥 날아든 것 같다. 새하얀 머릿속은 일순간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내 낯선 생각이 날아 든다. 시퍼렇게 질린 - 모즈비는 어디에나 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본다. 얼굴에 시퍼런 물이 든다. 나는 여기에 없다. 시퍼렇게 질린 모습을 마주하며 나를 되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머릿 속을 끄집어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된 작품으로 모즈비의 머릿 속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관객 스스로 시퍼렇게 질린 모즈비의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작품은 완성된다.
이채원 |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단지를 거닐다가 우연히 보았던 누군가의 베란다는 네온의 보랏빛에 물들어있었다.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오는 보랏빛은 시선이 사로잡혔다. 저 집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바라본 아파트의 베란다에서 가장 이질적인 빛이었다. 그렇게 잠시 시선이 머물던 곳은 금방 잊혀졌다.
어느 날 대나무와 페퍼민트가 차례대로 집에 들어왔다. 나는 잘 키우고 싶은 욕심에 사로잡혔다. 식물이 잘 자라는 법에 대해 검색했고, 그때 보았던 집에서 새어 나온 보라색 빛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도시인들의 주거 환경에서 더 자연스럽기 위한 식물의 환경을 조성해주는 생장등인 것이었다. 건물에서 바라본 가장 인위적으로 느껴진 빛이 도시에서 본 가장 자연스러운 빛이었던 셈이다. <도시인이 자연을 보는 방법>은 이 순간으로부터 출발한다.
작품에서 보라색 빛은 인공으로 만들었지만, 도시에서 바라본 가장 자연스러운 빛이자 도시에서 자연을 연상하게 하는 색이 된다. 그 빛이 비춘 베란다는 자연스럽기 위한 인공의 산물인 조화와 함께 꾸며졌다. 도시인이 자연을 느끼기 위해 만든 자신만의 공간인 것이다. 생장등, 조화와 같은 인공의 재료들과 식물과 흙, 돌로 이루어진 자연을 보기 위한 도심 속 공간을 담는다. 인공과 자연의 재료를 넘나들며 도시(인공)에서 보는 자연의 형태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치현 | 인간은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지만 현재 위치한 곳은 큰 인공물 덩어리에 속에 위치해 있다. 급격히 성장하는 현대사회에서 자연물과 인공물은 점점 극대화되며 본래 자연 속에서 기대었던 우리들은 점차 인공스러워진다. 본래 화분 속에 식물들은 저마다 터전이 있기 마련이지만 인간에 의해 심어지고 꾸며질 뿐 인공적인 행위에 의해 자연성은 점차 사라지지만 화분 속에 흙이라는 공간에서 또 다른 생태계가 만들어지며 식물의 형상을 한 작품들과 인공적인 틀안에서 자연의 일부분을 들여다보며 식물들은 주어진 환경에 변해가는 모습들은 그들의 사회에 적응해가며 각자의 자리에서 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면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주변 환경을 탓하며 불평 속에 살아갔던 현대인들에게 교훈을 주며 주어진 환경을 극복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다.
이한별 |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많은 동물들에게도 집은 안정된 생활을 위한 안식처와 같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은 신체성의 원리에 따라 몸으로 존재하는 신체적 주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은 신체의 존재이고 생활의 영역으로서의 거주가 요구되며 과거로부터 현재 아니 먼 미래에도 삶은 더욱더 복잡해지고 휴식의 필요성이 더욱더 요구됨에 따라 요람처럼 향유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 거주가 한편으로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작가 본인은 계속된 전출과정의 불안정성과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안정을 추구하려는 욕망대신 새로운 것들과의 만남을 찾는 것을 시도하며 또 다른 사고와 태도를 갈망하며 삶의 목표를 위해 나아가지만 현실은 비자발적 이동으로 사회에서 언제든 떠다녀야하는 객으로써 반복적로 삶의 터전을 옮겨 다니는 비정주적 특성의 유목적주거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이훈상 | 변하지 않는 꽃을 작가가 직접 스테인레스 스틸로 제단하고 용접하여 단단하게 만들어 그 꽃들로 양 과 사슴 그리고 자연을 표현해 나갑니다. 동물을 모티브로 하여 철재를 활용한 조형작업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구상을 동물의 형태적 요소에서 작가만의 조형 어법으로 단순화하며 다양한 컬러와 함께 여러분께 다가갑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만개한 꽃을 받을 때와 같이 아름다움이란 무형의 요소를 전달받을 때 기쁨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만의 조형 어법의 중요한 요소는 꽃잎의 형상에서 가져온 방식입니다. 단순화된 동물의 형상은 마치 꽃잎이 흩뿌려지며 만들어낸 순간을 포착과도 같은 정지된 혹은 영원한 찰나의 고착과도 같은 조형 작품입니다. 작가가 조금씩 만들어온 동물 형상과 꽃잎이 조화된 조형물들을 배치하여 박제된 아름다움을 공간에 표현해 나갑니다. 우리는 기쁨과 사랑,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대표적으로 꽃으로 많이 감정을 표현합니다. 이렇게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꽃들로 하여금 실존하는 꽃이 아닌 작가 스스로 만들어낸 철재로 이루어진 시들지 않는 꽃으로 나만의 기쁨과 사랑 과 감사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것들이 모여 작은 상상속의 정원을 이루기도 하고 작은 꽃 들을 모아서 하나의 큰 형태를 이루기도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 사람들에게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름다운 비밀의 화원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정호진 | 집은 나에게 있어 한 세계이자 안정의 근거가 되는 이미지와 형상의 집적체이다. 현재 진행중인 현지응축 시리즈는 우연적 결과물을 기대하며 진행하는 과정중심의 작업형태로 ‘현지’ 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 초점을 두었다. ‘사물이 현재 있는 곳, 일을 작업하는 그 곳, 헤아릴 수 없이 깊고 미묘한 뜻, 깊숙한 벽지’등의 의미를 갖는데, 이러한 의미들이 묘하게 혼재되어 서로 융합되고 응축될 때에 마침내 집이 내재한 시간과 분위기를 닮아있는 현지응축 작업의 결과물로 표현해낼 수 있었다. 나는 25년간 거주해온 집 내외〮부에 존재하는 사물과 풍경을 관찰했고, 공간의 내부와 창 밖으로 보이는 여러 자연물들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움직임 등을 포착하고 수집하였다. 그 과정에서 관찰의 주체자인 나는 집 내부에서 장소를 옮겨가며 장시간 한 자리에 꽂히듯 뜨개질을 반복했고, 꽃을 말리며 공간에 더욱 더 침투하였다. 그리고 행위와 포착물, 수많은 날의 분위기가 작업으로 연결되었다. 작품에서 편물의 얽히고 설킨 실, 여러 풍경을 닮은 두터운 질감과 색, 기억을 담은 특별한 향은 서로 뒤엉켜 결합되고 쌓여가며 익숙한 집과의 유사 풍경을 그려냈다. 이렇듯 현지응축 작업들은 긴 시간과 기억의 축적 결과물로서 단순 주거 기능의 집이 아닌 상상하고 되상상한 집의 실재로서 오랜 일상 속 친밀한 존재들을 한 화면에서 낯설게 구성하며 일상을 재조명하는 과정이다.
차정아 | 나에게 수면의 상태와 죽음의 상태는 다른 듯 비슷 했다. 모빌 같은 구조에 뼈만 남은 물고기는 아래를 주시하며 반복해서 돌고 있다. 물고기가 보고 있는 아래쪽에는 빨간색의 초가 켜져 있다. 이들은 무언가를 끝없이 갈망하는듯 초가 타 들어 가고 그 주위를 물고기는 돌고 있다. 물고기는 나에게 있어 행운의 상징 같았다. 모든 살이 발라지고 뼈만 남은 물고기가 반복하여 한자리를 돌고 있는데 3년간 불면증이 있었던 나에게 계속 돌고 있는 물고기는 정신 없고, 반복 되고 시끄러운 모터 소리에 예민해지고 멀미가 나는 듯 어지럽다. 보는 이들도 혼란스럽게 만드는 듯하다. 물고기의 텅 빈 눈은 초를 향해 있다. 내 꿈은 또렷하지도 이야기도 없다. 하지만 계속 반복 되어가고 있다. 잠을 자지도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빙글빙글 무언가를 찾고 있는 기분이다. 잠을 이루지 못해서 인지 나의 상황이 힘든 것인지 나는 내가 무엇을 찾는 지 어디를 가는지 알 수 가 없었다. 그저 혼란스럽기만 한듯하다. 나는 초가 삶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 한다. 우리는 생일에 초를 불고 누군가 죽었을 때도 초를 켠다. 초의 불과 연기가 하늘과 연결해주는 끈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뜨거운 불길을 보며 반복하여 돌고 있는 물고기는 어떤 상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