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 하는 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 요즘 나의 상황에서 말의 가치를 의심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일지도 모르겠다. 말(글)이 곧 지향이자 결과물인 비평의 속성상 이 일을 업으로 삼는 자가 말의 효용에 의구심을 품는다는 것은 병행할 수 없는 가치관의 상충을 가리키는 것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최근 보고 들은 일련의 경험들은 이 시대에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게 깊은 번뇌를 안겨주었다.
얼마 전 나는 우연히 어떤 사건 하나에 연루되어 상당한 심적 고초를 겪었다. 과거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였던 작가가 한 전시에 포함된 것을 알게 된 나는 해당 공간의 운영자에게 이를 알렸다. 해당 사건은 이미 몇 해 전에 법적 판결이 완료되어 가해 사실을 법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고, 공간의 운영자와 기획자는 작년 말 불거졌던 성폭력 사태 때 직간접적으로 SNS상에서 성폭력 반대 의지를 명시적으로 표방해왔던 자들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이라는 전시 주제에 해당 작가의 참여가 맞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운영자 및 기획자의 반응은 나를 당혹케 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가해자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본인들이 표방한 말과 현 전시 상황이 극히 모순이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친분과 이해관계가 얽힌 이런 유의 사건에서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기 쉽지 않음을 알고 있고, 성폭력 가해자 모두를 죄질의 정도와 관계없이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도 부적절하며, 한 번의 잘못으로 가해자를 영원히 배제시키는 것도 동의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모든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운영자와 기획자를 답 없는 딜레마에 빠뜨린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까지 품고 있던 나의 고민은 뭘 모르고 성폭력 반대 선언을 한 것 같다는 운영자의 말에 어이없이 무화되고 말았다.
행동이 뒤따르지 못할 때 쉽게 변질되는 말
물론 우리 모두가 이런 문제들에 무지했고 너나 할 것 없이 더듬더듬 배워나가는 중이다. 허나 집단 공황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작년 성폭력 사태의 직간접 당사자였던 이들이 자신들의 발화와 행동의 괴리에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는 점은 참을 수 없는 말의 가벼움으로 인해 허탈함을 불러일으켰다. 숨 가쁘게 쏟아지던 그 수많은 성폭력 반대 선언과 연대 발언 중 제가 하는 말의 의미를 알고 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가라는 의심과 함께. 급기야 이런 회의는 여성예술인연대(AWA)의 성폭력 반대운동에 서명을 망설이게 하였다. 실질적인 제도 변화라는 그들의 취지가 정확히 평소 주장하던 바였음에도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