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 지하 1층 전시실[사진=권미나 기자]
동시대 가장 영향력 있는 미디어 작가 중 한 명인 히토 슈타이얼의 대규모 개인전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가 4월 29일부터 9월 1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의 서울관 지하 1층 2,3,4 전시실에서 열린다.
전시 주제인 ‘데이터의 바다’는 히토 슈타이얼의 논문 <데이터의 바다: 아포페니아와 패턴(오)인식>(2016)에서 인용한 것으로,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디지털 기술 기반의 데이터 사회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할 것이 아니라 폭넓은 사유를 통해 다시 한 번 살펴보자는 기획의도를 담고 있다.
아시아 최초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형식의 1990년대 초기 영상 작품부터 인터넷, 가상현실, 로봇 공학, 인공지능 등의 디지털 기술을 인간과 사회라는 관계 안에서 조명하고 있는 최근 영상작업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품 세계를 망라하는 대표작 23점이 소개됐다. 특히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신작 <야성적 충동>(2022)도 최초로 공개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언론간담회에 참석한 히토 슈타이얼 [사진=국립현대미술관]
히토 슈타이얼은 예술과 철학, 정치 영역을 넘나들며 미디어와 이미지, 기술에 대해 사유하는 시각 예술가이며 저술가로 일본과 독일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연출을 전공하고 오스트리아 빈 미술 아카데미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디지털 기술, 글로벌 자본주의, 팬데믹 상황과 연관된 사회·문화적 현상을 심도 있게 탐구하고 철학과 비평적 통찰을 보여주는 영상 작업과 저술 활동으로 2000년대 이후부터 국제 미술계의 주목을 받아왔으며 2017년엔 영국 미술전문지 '아트리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광주 비엔날레(2010), 베니스 비엔날레(2013, 2015, 2019), 뉴욕 휘트니 미술관(2016), 시카고 현대미술관(2018), 파리 퐁피두센터(2021) 등에서 전시를 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 미술관, 테이트 모던, 퐁피두센터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전시는 총 5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각종 재난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디지털 시각 체제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지구 내전, 불평등의 증가, 독점 디지털 기술로 명명되는 시대에 동시대 미술관의 역할은 무엇인가?’, ‘작가가 "빈곤한 이미지"라고 명명한 저화질 디지털 이미지는 우리 삶의 양식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등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히토 슈타이얼, '미션 완료: 벨란시지'(2019)를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들[사진=권미나 기자]
1부 ‘데이터의 바다’에서는 데이터, 인공지능, 알고리즘, 메타버스 등의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 사회 속에서 이미지의 생산과 순환, 데이터 노동 및 동시대 미술관의 상황을 다룬 주요 작품 '태양의 공장'(2015), '깨진 창문들의 도시'(2018), '미션 완료: 벨란시지'(2019), '이것이 미래다'(2019), '소셜심'(2020), '야성적 충동'(2022) 등을 선보이고 있다.
히토 슈타이얼, '야성적 충동'(2022), [사진=국립현대미술관]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커미션 신작인 <야성적 충동>은 한 TV 프로그램 제작팀이 양치기 리얼리티 TV쇼를 제작하기 위해 스페인의 작은 산골 마을에 들어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는데 이 작품의 제목은 영상 서두에 등장하는 영국의 경제학자 존 매이너드 케인스가 1936년에 언급한 바 있는 ‘야성적 충동’에서 인용한 것이다. ‘야성적 충동’은 사람들의 감정이나 탐욕, 야망, 두려움으로 인해 시장이 통제 불능이 되고 미친 듯이 날뛰는 현상을 일컫는 개념으로 오늘날 비트코인, NFT 등과 연동된 야생 자본주의 시장을 언급하고 있다.
2부 ‘안 보여주기-디지털 시각성’에서는 영국의 전설적인 코미디 시리즈에서 제목을 인용한 <안 보여주기: 빌어먹게 유익하고 교육적인.MOV 파일>(2013)을 통해 디지털 기반의 감시 사회 속에서 '안 보일 수 있는 방법'을 다섯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카메라에 안 보이게 하는 방법, 시야에서 안 보이게 하는 방법, 이미지가 되는 방법, 사라짐으로써 안 보이게 되는 방법, 이미지로 만들어진 세계에 병합됨으로써 안보이게 되는 방법을 설명하고 질문함으로써 디지털 시각 체제를 둘러싼 날카로운 통찰과 유머를 즐길 수 있다.
히토 슈타이얼, '경호원들'(2012), [사진=권미나 기자]
3부 ‘기술, 전쟁, 그리고 미술관’에서는 기술 유토피아에 의문을 제기하고 기술과 전쟁의 이면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작품 <타워>(2015), <헬 예 위 퍽 다이(Hell Yeah We Fuck Die)>(2016)가 전시됐다. 또한 성전으로서의 미술관이 아닌 다양한 사회 현상과 연동된 장소로서 동시대 미술관의 새로운 위상을 해석한 작품 <면세 미술>(2015)과 <경호원들>(2012)을 볼 수 있다.
<경호원들>은 전쟁과 동떨어져 있다고 인식되어 온 미술관에서 전쟁을 역설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미국 시카고 현대미술관에서 촬영된 이 작품은 군인과 경찰, 군사시설에서 법을 집행한 업무 경력이 있는 론 힉스와 마틴 휫필드라는 미술관 경호원과의 인터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미술관의 벽을 주시하고 긴장감을 주는 침묵으로 주위를 경계하는 무장 경찰관과 자신들의 교전 경험을 시연해 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미술관을 마치 전쟁 지역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히토 슈타이얼, '자유낙하'(2010), [사진=국립현대미술관]
4부 ‘유동성 주식회사-글로벌 유동성’에서는 사물, 사람, 자본, 정보, 데이터, 등 모든 것이 순환하는 전 지구적 네트워크 시대에 순환주의의 의미를 담은 작품 <유동성 주식회사>(2014)와 <자유낙하>(2010)가 전시됐다.
<자유낙하>는 캘리포니아 모하비 사막에 있는 항공기 기지를 배경으로 촬영된 작품으로 보잉 707/4X-JYI 항공기의 연대기를 담고 있다. 항공기 재난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의 이미지를 재편집해 만든 이 작품은 보잉 항공기라는 사물의 역사를 통해 동시대 자본주의와 2008년 경제 위기를 암시하며, 중동 전쟁과 할리우드 시장 등의 관계를 엮어냄으로써 현실 세계의 유동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히토 슈타이얼, '비어있는 중심'(1988), [사진=국립현대미술관]
5부 ‘기록과 픽션’에서는 독일의 통일 이후 인종차별과반유대주의 등의 불평등 문제를 다룬 초기 다큐멘터리적 영상 실험을 기록과 픽션, 진실과 허구의 맥락에서 보여주고 있다. 히토 슈타이얼은 이 시기 건설 현장, 축제와 시위 현장, 공동묘지 등을 직접 방문하며 영상을 제작하였으며 인터뷰와 리서치, 아카이빙 등을 통해 역사학자나 문화비평가의 시선으로 현실을 기록하고 재해석 했다.
<비어있는 중심>은 베를린 포츠담 광장과 국회 의사당 사이에 있는 공간으로 히토 슈타이얼이 8년 동안 이 공간의 변화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장벽의 붕괴로 다시 베를린의 중심지로 돌아왔지만, 초국가적인 기업과 거대 자본에 의해 재건된 이 공간에서는 여전히 인종 차별과 외국인 노동자 반대 시위가 일어나곤 한다. 이곳에 세워졌던 경계선은 형태와 외관을 바꾼 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갖게 한다.
영상과 미디어를 공부하고 있는 김선태(31)씨는 “전시 공간이 작품들을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어 참 좋았다”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디어 작가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어 너무나 유익한 전시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9월 18일까지 볼 수 있다.
한편 히토 슈타이얼의 주요 저서로는 '진실의 색: 미술 분야의 다큐멘터리즘'(2008), '스크린의 추방자들'(2012), '재현 너머'(2016), '면세 미술: 지구 내전 시대의 미술'(2017)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