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월 1일부터 10일까지 복합문화예술공간 MERGE?에서 진행 - 먹과 한지로 그려낸 삶의 무늬,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사유하다.
부산의 복합문화예술공간MERGE?(머지)에서 지난 4월 1일부터 중견 화가 이태호의 개인전 <결, 또 다른 결>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1989년부터 기장 철마에 터를 잡고 묵묵히 작업에 매진해 온 작가의 깊은 성찰과 '삶의 무늬'를 한 자리에 모은 소중한 기회입니다. 전시장 현장에서 작가를 직접 만나, 그의 예술 철학과 삶을 바라보는 독자적인 시선, 그리고 작업 방식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담아보았습니다.
이태호 작가
■ 유화의 화려함 대신 먹의 담백함을 택하다
서양화를 전공한 이태호 작가는 2000년대 들어 익숙했던 유화 물감을 내려놓았다. 서구적 재료가 가진 특유의 번들거림과 과잉된 표현 대신, 그는 먹의 담백함과 한지의 스며듦에 매료되었다. 작가는 "화려한 낮이 사물을 분별하게 한다면, 어둠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느끼게 한다"며, 현대 사회에 결핍된 '사색'의 시간을 먹의 깊이감을 통해 구현해냈다.
작업실에서-다른풍경 / 종이,먹,연필 / 150X215cm / 2025
■ 인간과 자연, 경계를 허무는 '상생'의 미학
이태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얼굴이 없거나 뒷모습을 보인 채 익명성을 띤다. 이는 특정 개인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90년대 초 자연 훼손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 작업을 시작한 그는, 이제 "자연의 훼손은 곧 인간의 훼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작가는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본다. 작품 속에서 바람이 되고 나비가 되는 인간의 형상은 "내가 곧 너"라는 상생과 배려, 연민의 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2025_작업실에서-다른풍경_종이,먹,연필_150X215cm
■ "작가는 작업실을 버텨내는 사람"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결'은 삶의 무늬를 의미한다. 작가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단순히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규칙적인 노동을 통해 스스로의 여정을 확장해가는 과정이다. 그는 "작가는 기척과 낌새를 듣는 자"라고 정의하며,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는 수행자적 태도를 강조한다.
■ 디지털 아카이빙으로 기록되는 예술가의 생애
특별히 이번 전시는 지역 예술가의 삶과 철학을 디지털 콘텐츠로 기록하는 '다큐레이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어 그 의미를 더한다. 이 작가는 이에 대해 "한 시대를 기록하는 일은 엄정하고 냉정해야 하며, 예술가의 가치를 보존하는 대단히 중요한 작업"이라며 기대감을 전했다.
자연을 독립된 생명체로 바라보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이태호 작가의 이번 전시는 오는 4월 10일까지 이어진다.
이태호 개인전 전시장
이태호 작가 인터뷰 전문
Q. 안녕하세요? 작가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A. 1989년부터 기장군 철마면에 작업실을 짓고 이주하여 작업하고 있는 이태호입니다.
이태호 작가와의 대화 중
Q. 이번 전시의 타이틀인 ‘결, 또 다른 결’에 대해 간략한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개인전을 꾸준히 해오셨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개인전은 어떤 의미로 여기고 계시는지 이야기 듣고 싶습니다.
A. 결은 삶의 무늬를 의미합니다. 갖가지 삶, 자연의 그것과 함께, 모습들, 생각들, 의미들을 지칭했고요. 개인전을 통해 스스로의 여정을 펼쳐 보면서 때론 방황과 모색을 통해 이 여정의 깊이와 밀도를 넓혀 가는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번 전시도 마찬가지의 일입니다. 그리하여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기‘를 하는 일이고요. 지금도 여전히 방황하고 망설이며 한 걸음을 내딛는 중이라 차라리 내게 아직도 기대를 하게 된다는 역설적인 생각도 듭니다.
그리는 일 혹은, 사는 일은 의미를 내세우고 그것을 쫓아가는 일이 아니라 의미가 생성되기를 기대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Q. 작가님께서는 평소 작업 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A. 그리는 일이 일상의 일이기를 바랐는데 지금 그러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매일 규칙적인 작업시간이 나를 지탱하는 힘입니다. 작업실은 나의 삶의 현장입니다. 여기, 지금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내겐 작업의 결과보다 작업하는 과정이 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작업실을 버텨내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Q. 작가님께서는 서양화를 전공하셨음에도 먹과 한지를 주재료로 사용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재료만으로 장르를 구분하지는 않지만, 두텁게 올라가는 물감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작가님께서 한지와 먹, 흑연을 주재료로 사용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A. 2000년까지 유화 작업을 했었는데 유화물감이 내게 맞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당시 신문연제소설에 삽화를 맡아서 먹을 만지기 시작했었는데 그 전에도 유화 물감의 번들거림이 싫어 뽀삐오일이나 린시드를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테레핀이나 페트롤(속건성유)을 사용했었습니다. 유화작품들, 서양의 명화들조차, 볼 때마다 느끼하고 말이 많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먹의 담백함과 스며듦이 체질적으로 맞다는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낮은 형형색색의 것들을 분별하게 하지만 밤(어두움)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총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며, 우리시대가 결핍하고 있는 것은 사색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되기도 했습니다.
물 - 결 215x150cm 종이에 먹, 연필 2016
Q. 작가님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얼굴이 없거나, 뒷모습인 경우가 많아 익명성이 강조되는 듯한데요. 구체적인 형상을 드러내지 않고 자연물의 이미지가 투사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A. 어떤 개인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사람 일반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90년 초 자연의 훼손이 주제였던 시기였는데 처음에는 고발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작업들을 했었는데 작가로서의 대안을 생각했었고 결국 자연의 훼손은 사람의 훼손에 다름 아닌 것이며 제도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중심의 세계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인간규모를 벗어 난 오만과 허위의 삶은 훼손을 가속시킬 뿐이라는 생각에서 상생, 배려, 연민등을 주제로 작업했던 시기였습니다. 결국 내가 바람이며 새며, 나비며, 궁극적으로 ’너‘라는 생각이 아니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었습니다.
Q. 작품에서 바로 포착할 수 있는 요소는 ‘자연물’과 ‘인간’인 것 같습니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이 요소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A. 사람은 자연의 일물입니다. 나는 ‘너’라는 생각이 아니면 나를 옹졸하게 경영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바깥에 있다는 이 생각, 내게 보여지는 것, 들여지는 것, 느껴지는 것, 이 모든 것이 나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퍼포먼스-다른풍경_종이,먹,연필_150X215cm_2025
Q. ‘다큐레이팅 프로젝트’는 예술가로서의 삶과 철학을 디지털 콘텐츠로 기록하고 조명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소감이나 기대하는 부분이 있으신가요?
A. 대단히 중요하고 꼭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만큼 작가 선정 과정의 엄정하고 투명한 객관적 논의, 좀 더 많은 시간과 기술적 완성도를 가지는 일 등은 필수적이고요. 한 시대를 기록하는 일은 냉정하고 엄정해야 가치를 가지게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