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파 에차크흐(Latifa Echakhch)의 "Hospitalité"(환대, 2006) - 프랑스어로 '외국인이 채울 공간'이라고 쓰여있다. 리옹 현대 미술관의 비엔날레 전시 작업 중 하나이다. (사진=이소이 기자)
현재 열리고 있는 제17회 리옹 비엔날레의 제목은 “강의 목소리, 물을 가로질러(Les voix des fleuves Crossing the water)”이다. 더 정확히 번역하면 ‘강들의 목소리들’이다. 세상에는 여러 목소리가 있으며 그동안 듣지 못했던 혹은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듣겠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주변에 존재했던, 그렇지만 눈에 띄지 않았던 존재들 혹은 인간을 둘러싼 관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주목해 보라는 호소이기도 하다.
들리지 않던 목소리는 구체적으로 힘이 없는 목소리, 변방의 목소리 아니면 실존의 토대를 이루는 역사의 목소리를 의미한다. 이방인, 외국인처럼 변방에 있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존재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의도가 리옹 현대 미술관(Mac Lyon)에서 강하게 드러났다면, 이번에 처음으로 리옹 비엔날레 전시가 열리는 레 그랑드 로코(Les Grandes Loco)에서는 이 공간의 역사처럼,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그래서 듣지 못했던 역사의 소리가 아티스트의 작품을 통해 아우성친다.
리옹 비엔날레의 전시는 리옹과 주변 도시에서 열린다. 그중 세 곳에서는 대규모 전시가 열리며 시간이 없는 관객은 이 세 곳의 전시만 보고 가는 경우도 많다. 그중 두 곳은 고정된 장소이고 (Mac Lyon, Institut d’art contemporain Villeurbanne) 다른 한 곳은 다음 비엔날레 때에는 바뀔 수 있는 장소로서, 올해 선택된 공간이 레 그랑드 로코이다.
레 그랑드 로코 내부에 공간의 역사를 소개하는 글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이소이 기자)
현대 미술에서 폐건물 혹은 버려진 공간을 전시 공간으로 활용하는 건 이제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다. 영국 런던의 테이트 모던이 대표적인 곳으로, 건물은 전력 발전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져, 쓰이다가 버려진 건물을 영국 정부가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레 그랑드 로코 전시의 특이한 점은 이 공간이 버려지기 전까지 어떻게 사용되어 왔는지를 설명하는 자료가 여기저기 전시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르면 레 그랑드 로코는 1846년 용광로 회사에 의해 설립된 산업시설로 20세기에 들어서는 프랑스 철도청 기술센터로 쓰였으며, 2019년에 문을 닫기까지 철도 부품을 유지 및 보수하는 공장으로 쓰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배경지식 없이도 방문객은 레 그랑드 로코의 외관을 보고 이 공간이 산업 시설 혹은 공장으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다. 방문객의 마음속에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모습이 도식처럼 새겨지며 전시에서 만나게 될 작업은 이 도식 위에서 해석된다. 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작업이 생각보다 쉽게 이해가 되는 건 아티스트들도 이런 방문객의 선지식 혹은 선입견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작업 혹은 디스플레이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레 그랑드 로코 외관. 누구나 공장으로 쓰였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사진=이소이 기자)
건물과의 조화
레 그랑드 로코의 첫 번째 홀에 들어가는 순간 눈에 띄는 건 공장의 모습과 어울리는 작업의 배치이다. 너무나 잘 어울려서 때로는 어떤 게 작업이고 어떤 게 원래 있던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저기 배치되었던 컨테이너들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공간에 배치된 컨테이너는 아티스트의 작업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각 컨테이너 안에서는 각자 다른 아티스트의 비디오 작업이 상영 중이었기 때문이다. 컨테이너 배치는 큐레이터와 아티스트들 간의 대화로 만들어진 일종의 디스플레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이 공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 작업을 보게 되며, 아마도 아티스트와 큐레이터는 이런 효과를 노렸을 듯 하다. 그래서 안드리우스 아루티우니안(Andrius Arutiunian)의 인종차별을 다루는 비디오 작업(End Pull, 2024)이 크게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 한스 샤부스(Hans Schabus)의 거대한 나무 설치 작업인 ‘움직이는 사람을 위한 건축물(Monument for People on the Move, 2024)도 마찬가지이다. 이 설치 작업은 첫 번째 홀 한가운데 가로로 누워 있는 나무로 이루어진 원형통이며 관객이 그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설치 작업은 공사장에서 이따금 볼 수 있는 시멘트로 만들어진 거대한 원형 구조물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공사장 구조물과의 차이를 눈에 띄게 해 관객의 색다른 경험을 끌어낸다. 미리암 미힌두(Myriam Mihindou)의 작업 ‘이야기할 때, 손가락을 들어라(Lève le doigt quand tu parles, 2024)'도 철근을 가져다 쓰면서 전시 공간과의 조화를 만들어낸다.
컨테이너 안에서는 비디오 작업이 상영되고 있다. (사진=이소이 기자)
오른쪽, 한스 샤부스(Hans Schabus)의 설치 작업 ‘움직이는 사람을 위한 건축물(Monument for People on the Move, 2024)' (사진=이소이 기자)
한스 샤부스(Hans Schabus)의 설치 작업 ‘움직이는 사람을 위한 건축물(Monument for People on the Move, 2024)' 내부 모습 (사진=이소이 기자)
미리암 미힌두(Myriam Mihindou)의 설치 작업 ‘이야기할 때, 손가락을 들어라(Lève le doigt quand tu parles, 2024)' 전경 (사진=이소이 기자)
공간의 사회적, 정치적 의미 활용
공간이 공장 혹은 산업 시설이었다는 점 때문에 공간은 정치적, 사회적인 의미를 지닐수 밖에 없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작업이 생각보다 많이 없는 것이 레 그랑 로코 전시의 특징이다. 그래서 전체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제레미 델러의 작업이 눈에 띈다. 델러는 ‘More poetry is needed(더 많은 시가 필요하다)’, ‘Smoking kills(담배는 사람을 죽인다)’ 등과 같은 덜 정치적인 메시지를 ‘Jede Ära hat ihren eigenen Faschismus(각 시대는 자신만의 파시즘을 가진다)’ ‘Putin’s happy(푸틴은 행복하다)’ 등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깃발과 함께 천장에 걸어놓아 모든 메시지를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관객들은 공간에 대한 도식 덕분에 아티스트의 의도를 더 쉽게 파악하고, 더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앞서 언급한 안드리우스 아루티우니안의 작업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보카르 니앙(Bocar Niang)의 설치 작업 ‘murdesmots(2024, 단어로 이루어진 벽을 의미하는 mur des mots 를 띄어쓰기 없이 써놓음)’도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니앙은 70개의 단어를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풀라어(서아프리카 플라족의 언어), 월로프어(서아프리카 월로프어족의 언어)로 함께 써놓은 천을 세로로 길게 늘어트려 전시해 놓았다. 소수만이 쓰는 언어를 세계적으로 유명한 언어와 함께 전시해 놓았다는 데 이미 정치적인 문제의식이 보이며, 이런 의도는 공간이 지닌 특성과 연결되어 더 잘 드러난다.
제레미 델러 전시 전경 (사진=이소이 기자)
보카르 니앙(Bocar Niang)의 설치 작업 ‘murdesmots(2024)' 전경 (사진=이소이 기자)
공간의 역사가 드러나는 방식 차용
사실 니앙의 ‘murdesmots’는 공간이 지닌 역사를 드러내기보다는 방문객들이 스스로 이 역사를 구성하고 느끼는 방식을 활용한다. 언급했듯 방문객은 공간의 역사를 알고 혹은 짐작하면서 나름의 ‘공간’에 대한 도식을 가지고 전시 공간에 들어오며, 이 도식을 토대로 전시된 작업의 의미를 파악한다. 니앙을 비롯한 몇 아티스트는 이런 방식으로 공간이 해석되는 점에 착안하여 다른 방식으로 즉, 간접적으로 정치적인, 혹은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추록 히리에츠(Chourouk Hriech)도 그중 하나이다. 히리에치는 ‘새들의 오아시스(L’oasis des oiseaux, 2024)'라는 조각, 비디오, 대생 등의 다양한 미디움으로 이루어진 유르트(yurt, 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전통 천막집)를 전시하면서 다양한 문화, 생물이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융합할 수 있는 상상 속의 세계를 구현해 냈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작업은 시적으로만 보일 수도 있지만 레 그랑드 로코라는 차가운 공간의 성격, 공간의 역사와 합쳐져 시적인 정치성을 드러낸다. 거기에 요즘 현대 미술을 사로잡고 있는 문제의식인 ‘환경’, ‘생태’, ‘기후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작업을 본다면 히리에츠의 작업은 사회성까지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추록 히리에츠(Chourouk Hriech)의 설치 작업 ‘새들의 오아시스(L’oasis des oiseaux, 2024)' 전경 (사진=이소이 기자)
추록 히리에츠(Chourouk Hriech)의 설치 작업 ‘새들의 오아시스(L’oasis des oiseaux, 2024)' 내부 모습 (사진=이소이 기자)
공간의 역사를 활용해서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더 강하게 담아냈다고 해서 그 작업이 좋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예술에서 중요한 건 무얼 말하는 것보다 어떻게 말하는지에 있기 때문이다. 시와 산문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술의 다른 특징 중 하나는 메시지를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영어 단어,(opacification:혼탁하게 함)이 예술의 큰 특징이다. 그래서 때로는 메시지를 명석, 판명하게 전달하는 작업이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며, 정치적인 의도가 너무 드러난 작업이 일종의 프로파간다 역할을 할 수도 있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예술성은 전하려는 메시지와 전하려는 방법 사이의 긴장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리옹 비엔날레 특히, 레 그랑드 로코의 전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런 긴장을 잘 유지했다. 레 그랑드 로코에 처음 들어갔을 때 관객이 보고 느끼는 건 어떤 정치적인 메시지라기 보다는 공간의 벌거벗겨진 의미이다. 그리고 많은 아티스트들에게서 공간의 숨어있는 동시에 드러나는 의미를 활용하려는 의도가 보였으며, 성공적으로 활용한 이들도 많아 보인다. 공간에 들어서는 관객은 시노그래피가 만들어낸 특이한 분위기 속에서 작업 하나하나와 만나게 되며, 많은 작품이 관객과의 조우를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적당히 은유적,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그래서 평소라면 너무 드러내놓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해서 불편함을 유발할 법한 작품들에 대한 반감도 줄어드는 느낌이다.
사실 공장으로 쓰던 폐건물을 활용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작업을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공간의 강한 특성 때문에 작업의 가능한 해석은 하나가 되며 아티스트도 정치색을 진하게 띤 하나의 메시지만 이야기하는 식이다. 반면 이번 리옹 비엔날레 레 그랑드 로코의 전시는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정치적인 메시지를 세련되게 그리고 시적으로 표현한다. 아티스트가 메시지를 투명하게 전달하지는 않지만 작업은 공간으로부터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얻게 되며, 관객은 그 틀을 가지고도 작업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정치의 시가 가능하다면, 어쩌면 그건 관객의 자유를 전제한 메시지와 형식 사이의 긴장에서만 가능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