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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르 롬바르도 [2] - 인시튜 (In situ)의 의미를 비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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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시튜(In situ) 작업은 작품이 놓이는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업이며, 그래서 보통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 작품이라고 불린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국가/도/시의 문화 기관이 인시튜 작업을 할 아티스트를 공개적으로 뽑는 경우가 많으며, 선발되는 아티스트는 설치 장소에 어울리는 작업을 한다. 그래서 아티스트의 인시튜 작업은 주변과 함께 어우러지는 작업 혹은 이미 존재하는 것의 조형적인 번역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미술에서 인시튜 작업의 시초는 보통 다니엘 뷔렌(Daniel Buren)으로 본다. 아틀리에, 갤러리와 같은 닫힌 공간에서 미술 작품을 해방하면서, 고전/근대 미술이 지니던 규범을 위반하기 시작했다는 이유이다. 하지만 인시튜 작업 방식 자체가 기관화(Institutionalisation, 작업이 공식적인 미술계 안에서 인정을 받음)의 과정을 거치고, 아티스트가 문화/예술 기관이 요구하는 규범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인시튜 작업이 현대 미술에서 가졌던 발칙한 성격은 많이 사라졌다.

세자르 롬바르도(César Lombardo)는 이런 미술계의 상황에 끝까지 저항하고 있다. 단순히 그가 그리는 것이 일상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인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 아니다. 작업을 전시하는 방식이 롬바르도의 예술적 앙가주망을 드러낸다.

롬바르도는 앞의 글(세자르 롬바르도 [1] – 타인의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다)에 언급했던 인물 드로잉을, 조르쥐 퐁피두 센터(Centre Georges Pompidou), 프티 팔레(Petit Palais), 발랑스 미술관(Musée de Valence), 카르티에 재단(Fondation Cartier) 등 유명 미술관의 화장실에 전시했다. 미술관이란 얼마나 고귀하고 성스러운 곳인가? 현대 미술이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면서, 예술이라는 것이 쌓아온 성스러움의 이미지를 파괴했다고는 하지만, 미술관은 여전히 나를 타인과 ‘구별 짓는' 공간이며, 그렇기에 계속해서 성스러운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미술관 이름이 적힌 에코백은 명품 백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고귀하게 만들어주며, 이걸 드는 순간 나는 예술에 관심이 많은 지적인 사람이 된다. 50유로를 주고 산 명품 재단 이름이 적힌 에코백은 같은 브랜드의 훨씬 비싼 명품 가방보다 더 화려한 문화적, 지적 아우라로 나를 감싸준다.

성스러운 미술관에서도 성스러움과 가장 먼 곳이 화장실이다. 고귀한 장소 안에 있는 가장 더럽고 내밀한 공간에 롬바르도는 자신이 그린 드로잉, 그것도 인물 드로잉들을 걸어두었다. 여러 눈이 일을 보는 나를 지켜보며, 나 스스로가 느끼고 있었던 지적 우월감을 비웃는 듯하다. 관객(?)은 자신을 보는 여러 눈을 의식하게 되지만, 하려고 했던 일을 중단할 수는 없다. 다만 불쾌함을 느끼고 자신이 처한 공간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볼 뿐이다.

프티 팔레 개인전, 2020,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프티 팔레 개인전, 2020,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화장실, 그것도 변기 옆에 드로잉을 설치함으로써, 롬바르도는 미술계 작동 방식의 정당성에도 질문을 던진다. 롬바르도가 드로잉 설치 작업을 전시한 곳은 미술계에서는 권위가 있는 기관이다. 소위 말하는 이미 '검증된' 아티스트(artiste confirmé)가 전시할 수 있는 곳이며, 전시를 둘러싼 여러 힘의 역학관계가 선택된 아티스트를 통해 드러나는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 신진 아티스트가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기회는 드물다. 유명 미술 기관의 화장실 변기 칸, 즉, 보이지 않는 곳에 자신의 작업을 설치하며, 롬바르도는 기관이 은닉하고 있는 힘의 역학 관계에 반기를 던지며, 작업을 보는 사람이 이런 상황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카르티에 재단 개인전, 2021,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롬바르도가 화장실에서 개인전을 할 때, 옆에서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카르티에 재단 개인전, 2021,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롬바르도가 화장실에서 개인전을 할 때, 옆에서는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롬바르도는 이력서에 유명 미술관의 개인전 경력을 몇 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이를테면, 그의 이력서에는 조르쥐 퐁피두 개인전, 프티 팔레 개인전, 발랑스 미술관 개인전, 카르티에 재단 개인전 이력이 채워진다. 이 기관들에게 인정받지 않았지만, 그리고 기관 몰래 전시를 했지만, 거기서 전시를 하긴 했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이력서를 채우면서, 롬바르도는 또다시 현대 미술계를 이루고 있는 네트워크에 도전한다.

현대 미술의 큰 특징 중 하나는 한 작업에 대한 미적 판단이 어렵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이상 작품의 감각적인 특징(색, 선, 면 등)을 보고 예술적인 가치를 판단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아티스트들은 자신을 대상으로 쓴 평론, 전시 경력으로 자신을 치장하며, 갤러리스트나 예술 기관 종사자는 실패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작품만을 보고 아티스트를 선발하지 않고, 이력을 보고 전시할 아티스트를 선정한다. 아티스트의 이력은 아티스트가 미술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이 관계가 아티스트의 능력을 보장해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안 코클랑(Anne Cauquelin)은 현대 미술을 '소통의 사회'의 산물로 묘사한 바 있다. 근대 미술이 '소비 사회'의 산물이라면, 현대 미술은 '소비'를 넘어선 '소통', 즉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사회의 산물이며, 결국 이 네트워크 내에서 한 아티스트의 위치가 그의 작업의 가치, 그의 이름의 가치를 규정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대 미술은 내적 가치, 본질적 가치보다는 ‘이름’이 주는 가치를 더 중요시한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롬바르도는 화장실 개인전을 통해 '소통의 사회'의 결과물인 현대 미술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며, 그에 도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이력을 유명 미술관의 개인전 경력으로 채움과 동시에 미술계의 작동 방식을 비웃는 것이다.

설치된 곳, 즉 유명 미술관의 화장실 변기 칸이 롬바르도의 작업 의도를 정확히 설명한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기존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인시튜 작업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인시튜 작업은 반기관적이며, 그렇기에 도발적이다.

다른 설치 작업을 보자. 롬바르도는 파리의 리볼리 59번지 건물(Rivoli 59) 벽에 자신이 그린 초상화를 전시했다.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롬바르도는 사람들이 버린 종이상자를 활용했다. 그림이 미술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깔끔하게 정돈된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설치된 그림은 어딘가 너덜너덜하며 그래서 미술관에 모셔져 있는 고귀한 예술작품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런 그림들을 리볼리 59번가 건물에 전시하며, 그는 자신의 작업이 인시튜라고 설명한다.

59 Rivoli 전시, 2023,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59 Rivoli 전시, 2023,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리볼리  거리는 파리 중심에 있는 거리로, 파리에서 두 번째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이다. 주변에는 명품 가게들이 즐비해 있으며,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쇼윈도는 비싸고 아름다운 상품들이 장식하고 있다. 특히 리볼리 거리에는 산 마리텐 백화점도 있는데, 이 백화점은 옆에 있는 루이뷔통 파리 본사와 함께 유명 아티스트의 작품으로 외관을 장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2023년에는 세계적인 아티스트 야요이 쿠사마의 작품으로 거리를 장식했었다. 프랑스 철학자 이브 미쇼(Yves Michaud)는 '기체 상태의 예술'(L'art à l'état gazeux)이라는 책에서 현대 사회를 아름다움이 도처에 있는 사회라고 묘사했다. 리볼리 거리는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정수를 보여준다.

루이비통 파리 본사 앞 야요이 쿠사마 전시, 2023, 사진 = 진승우
루이비통 파리 본사 앞 야요이 쿠사마 전시, 2023, 사진 = 진승우

리볼리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눈에 롬바르도의 전시가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인시튜가 주변과의 조화를 의미한다면, 롬바르도의 설치는 인시튜가 아니다. 롬바르도가 설치한 초상화는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않으며, 오히려 아름다움, 상업화된 미와는 대조를 이룬다. 너덜너덜한, 대충 설치해 놓은 것 같은 그래서 굉장히 부족한 것 같은 그의 설치는 리볼리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의 설치는 망치를 맞는 모난 못처럼 돌출해 있다.

롬바르도에게 인시튜는 일상적인 삶의 연속성을 끊어내는 것이며, 그래서 불쾌함, 불편함을 주는 것을 감수하고 사람들에게 현재 상황을 의식하게 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그의 인시튜는 부조화, 거리 두기, 불편함을 수단으로 삼으며, 관객, 통행자의 시선을 사로잡아 사회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는 현대 미술이 태동할 때 지녔던 문제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즉, 현대 미술이 근대 미술에 대한 반감으로 다방면으로 문제를 제기하면서, 모든 미적인 규범, 예컨대, 진실성, 무사로움(이익을 생각하지 않음) 등의 미학적 규범을 파괴하려고 했던 정신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 앞서 말했듯, 인시튜 작업은 하나의 공인된 미술 작업 방식이 되어, 초기에 가졌던 발칙함, 도발성을 잃었다. 지금 인시튜를 하는 많은 아티스트들은 기관이 원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고, 기관에 순종하는 경우가 많다. 롬바르도는 인시튜의 의미를 비틀며 현대 미술에서 인시튜 작업을 처음 시도했을 때의 정신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회에 조그마한 틈을 만든다는 점에서, 그의 작업은 비판적이며, 정치적이고, 그의 행위는 소심하지만 혁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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