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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르 롬바르도 [1] - 타인의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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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gnol’s band, 2014 - 계속, 320x250 cm, 캔버스에 아크릴,  (infinie œuvre évolutive suivant les élections, 선거 결과에 따라 계속 진행되는 작품)
Guignol’s band, 2014 - 계속, 320x250 cm, 캔버스에 아크릴, (infinie œuvre évolutive suivant les élections, 선거 결과에 따라 계속 진행되는 작품)

세자르 롬바르도(César Lombardo)는 주변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는다. 그의 주변은 범위가 넓다. 주변의 지인부터 길거리의 사람들, 그리고 저 멀리 텔레비전에서 보는 정치인들까지, 자기가 만나고, 보고, 듣는 모든 사람, 모든 사건이 그림의 소재이다. 자신은 중립적이며, 듣고 본 바대로 그림을 그린다고 말하는 롬바르도, 하지만 그의 선택이 그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La vie d'artiste, 2015, 캔버스에 아크릴, 140 X 106 cm
La vie d'artiste, 2015, 캔버스에 아크릴, 140 X 106 cm

그가 자신을 그린 그림 ‘La vie d’artiste’(아티스트의 삶)을 보자. 롬바르도는 실업 공단(pôle emploie)에서 공무원과 상담하는 자신을 그리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 즉 일거리를 찾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한다. 여전히 지속되는 아티스트를 향한 낭만주의적 이미지, 세상과는 거리를 두며, 경제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만 몰두하는 이미지를 비꼬는 한편, 이 이미지 뒤에 있는 아티스트의 불안정한 삶을 그린다. 아티스트는 특별한 존재인 동시에 사회에서 끊임없이 위협당하는 존재이다.

Multination’art, 2023, 캔버스에 아크릴
Multination’art, 2023, 캔버스에 아크릴

‘Multination’art’에서는, 온갖 대기업 로고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잘 차려입은 여자가 있다. 비슷한 느낌의 자화상 ‘Un roi avec divertissement’(놀이의 왕)에서는 잠옷을 입은 자신이 등장하며, 여기서도 명품 로고와 소셜 미디어가 아티스트 자신을 치장하고 있다. 이 두 그림에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이미지를 맹목적으로 쫓는 현대인을 풍자적으로 그리면서, 자신 또한 부유한 현대인의 이미지에 매혹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Un roi avec divertissement, 2021, 캔버스에 아크릴
Un roi avec divertissement, 2021, 캔버스에 아크릴

한때, 롬바르도는 지인들의 집을 돌아다니며 숙식을 해결했으며, 자신을 재워준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얼굴들을 그린 드로잉으로 유명 미술관의 화장실에서 개인전을 했다. 롬바르도는 몰래 했던 이 개인전에 대해 "나를 지켜줬던 사람들의 얼굴로 화장실을 나만의 피난 장소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신을 재워줬던 사람들은 ‘세자르’가 ‘세자르’일 수 있도록 지켜줬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발랑스 미술관 (Musée de Valence)개인전, 2021,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발랑스 미술관 (Musée de Valence)개인전, 2021,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저서 '전체성과 무한'(Totalité et infini)에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인 존재 방식을 거주와 노동을 통한 향유라고 묘사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즐김과 누림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며, 거주와 노동을 통해 인간 개개인이 자신만의 내재성, '자기'를 확립한다. 이런 상황에서 약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타인의 '얼굴'은 '나' 중심의 사고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새로운 존재로의 초월을 가능하게 하는 자라는 것이 레비나스 철학의 골조이다. 

59, 건물 안 전시, 2021,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59, 건물 안 전시, 2021, 사진 출처 = 인스타그램 @cesarcez16

롬바르도는 처음부터 타인과의 관계 속에 거주한다. 그가 가진 자기 정체성은 처음부터 타자를 염두에 두며, 그렇기에 그의 거주는 바깥(외재성)으로의 지향이다. 그가 타자와 맺는 관계는 무사심한 관계, 이익을 떠난 관계이며, 이런 관계에서만 그는 '자신'을 찾는다. 물론, 그에게도 타자의 시선은 불편함이겠지만, 적어도 지옥은 아니다. 그에게 지옥이란 자신을 구성하는 무사심한 관계, 비존재론적인 관계를 부숴버릴 수도 있는 권력의 지배관계이다.

롬바르도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관계에서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래서 자기를 구성하는 지인들의 얼굴로 사회를 바라본다. 세계는 그를 보호하는 것(지인들의 얼굴)이거나, 그를 위협하는 것(경찰의 폭력), 그를 유혹하는 것(명품), 사회적 약자가 된 잠재적인 그의 모습들(노숙자)로 가득 차 있다.

Un roi avec divertissement 의 일부
Un roi avec divertissement 의 일부

그가 보는 사회의 모습이 언제나 비판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권력은 말을 듣지 않으면 나의 존재를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고 협박한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거리에서 사는 노숙자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도 노숙자처럼 투명해지고 벌거벗겨질 수 있다는 협박이다. 권력은 협박만 하지 않는다. 협박 반대편에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명품으로 치장할 수 있을 거라는 약속이 있다. 이 달콤한 약속을 위해 현대 사회는 얼마나 많은 신화를 만들어냈던가?

지인의 초상 드로잉
지인의 초상 드로잉

이렇게 롬바르도는 주변 사람, 정치인을 그리며, 자신만의 세계관을 표현한다.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은, 롬바르도 자신이 경험한 그대로의 모습이다. 예컨대, 초상화는 캐리커처의 외관을 띄며, 그렇기에 관객은 그려진 사람들의 성격을 볼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주변 사람보다 멀리 있는 사람을 더 잘 '본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누군가의 특성을 더 잘 알아차린다는 것이 아니라, 더 잘 '도식화'한다는 것이다. 내 옆에 있는 애인의 성격은 굉장히 복잡하지만, 텔레비전에서 보는 정치인 누군가의 품성은 굉장히 단순하다. 애인은 때로는 울거나, 웃거나, 화내거나, 미소 짓지만, 정치인은 올바르거나 올바르지 않을 뿐이다. 

Guignol’s band, 2014 - 계속, 320x250 cm, 캔버스에 아크릴, (infinie œuvre évolutive suivant les élections, 선거 결과에 따라 계속 진행되는 작품)
Guignol’s band, 2014 - 계속, 320x250 cm, 캔버스에 아크릴, (infinie œuvre évolutive suivant les élections, 선거 결과에 따라 계속 진행되는 작품)

롬바르도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주변 사람들을 그린 드로잉은 개개인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지만, 정치인의 그림은 그보다는 단순하며, 그렇기에 풍자적이고, 노숙자를 그린 그림은 단순함과 복잡함 그 중간의 어디에 있다. 롬바르도는 그림을 그리면서 '증언'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증언'을 올바로 보기 위해서는 '증언'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롬바르도의  '증언'은 그가 느낀 감정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렇기에 주변 사람을 그리면서 하는 증언, 노숙자를 그리면서 하는 증언, 진압 경찰을 그리면서 하는 증언, 정치인을 그리면서 하는 증언에는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깃들어있다.

Le paris des cartes postales, 2023, 캔버스 위에 아크릴
Le paris des cartes postales, 2023, 캔버스 위에 아크릴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그림이 '정치적'이라는 판단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 자신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그리기 때문에 자신의 작업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권력이 휘두르는 채찍과 당근 둘 다 중립적으로 묘사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모든 정치적 가치관은 자신의 실존에서부터 드러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작업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가득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가 자신이 속한 상황에서 사회를 묘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두고 있는 무사심한 관계를 위협하는 사회를 묘사하는 건 중립적일 수 없다.

Insoutenable culture, 2017, 캔버스에 유화
Insoutenable culture, 2017, 캔버스에 유화

그가 사회를 표현하는 방식은 미술계를 향한 비판에서도 계속된다. 롬바르도가 말하는 Art populaire(대중 예술), Contre culture(반-문화)도 권력관계의 틀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반-문화’를 말할 때 문화가 의미하는 바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문화이다. 하지만 롬바르도는 대중 예술을 반-문화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 현 소비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소비문화를 차용한다는 것이다. 소비문화를 차용하는 이유는 작업이 보다 더 쉽게 대중에게 다가가게 하기 위함이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수의 엘리트만이 해석 코드를 독점하는 미술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이 코드라는 것은 르네상스 이후부터 계속되어 오는 모방에의 집착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사변적인 미술 이론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롬바르드는 이 모든 것에 반대한다. 그래서 그는 나이브 아트(Naïf Art)를 표방한다. 미술계를 둘러싼 권력관계 역시 그의 표현에서 드러나는 이유이다.

현대 사회와 미술계를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모두가 맹목적으로 쫓는 자본주의 가치에 반기를 들며, 롬바르도는 끊임없이 반골기질을 표현한다. 그는 무엇인가를 계속 위반한다. 미술사가 지녔던 작업 방식을 비아냥대며, 미술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면서, 문제없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대 사회의 이면을 묘사하면서, 그는 끊임없이 '문제가 없어보이는 외관'의 이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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