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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공간에 대한 자리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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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영(미술평론가)

[평론] 공간에 대한 자리까지는

Date 2023.03.15(수) ~ 2023.04.02(일)
Venue 갤러리밈
Address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5길 3

김봄의 'Placescape' 전은 장소와 풍경이라는 두 가지 개념어가 복합되어 있다. 장소와 풍경은 비슷한 의미로, 둘을 놓고 보면 차이가 난다. 풍경은 장소로부터 행사 거리를 멀다. 장소는 내가 보는 가까운 곳이고 풍경은 내 특별한 공간이다. 풍경은 보다 많은 사물을 담지만 그 구성요소는 크기가 작은 것이 아니다. 전시된 작품들은 원근법적 풍경부터 위성사진으로 포착된 지도까지 포괄한다. 장소는 가깝고 가까운 곳이고 이곳에서의 물건은 보다 커지며 다가온다. 장소에 있는 물건은 독특한 배치와 각도 등이 가능하다. 지도에 기반한 작품이 전시된 1층과 달리고, 2층 전시 작품들의 경우, 바로 앞에서 본 전시장도 꽤 많이 보인다. 여기에는 장소적 공간적 시간적 기억을 포함한다. 그것은 간판 심상 지도(mental map)이다. 조너선은 임시 [자리 잡기]에서 내 현상에서 의미의 위치와 정보를 어떻게 엿볼 수 있는지 심상 지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심상지도는 시각적인 위치나 환경을 넘어서서, 심각하게 예상되는 의미인 깊이는 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김봄의 작업에는 최근의 기록과 기억이 표시되곤 한다. 자리를 '특별히 비상함을 기억하고, 기억을 오늘을 기억하며 영속화되는 것'(조너선 약속)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10년 간 페인트온 지도를 바탕으로 작업과 지도를 내부 여행으로 완성을 담았다. 'Placescape'라는 복합어처럼 소통은 되지 않는다. 장소와 풍경은 안과 밖 같은 관계로, 안낮은 움찔해진다. 어떤 대상, 사람, 장소 등은 가까이서, 그리고 멀리서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첫인상은 강력한 것, 좋은 의미든 아니든 개조될 기회를 적습니다. 작가가 주요한 동양화나 동물로 삼은 고지도 등은 여러 시점을 나타낸다. 이러한 복합적 풍경에는 ​​보이는 것, 중요한 상징 등이 존재한다. 작은 현대의 시공간은 이러한 다차원적 연결이고, 모든 것을 동일한 코드로 연결시키려는 버튼이다.

추상적인 구조로부터의 탈주에서 예술의 역할은 엄청납니다. 예술 자체가 초상화의 탈주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세계시로 완전히 되었다는 듯, 현대인은 위도와 수직이라는 가능성축으로 비상진 하나의 지도만을 알고 있다. 종합은 생산적이다. 근육의 생산력이 인간과 자연을 지향하는 방향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예술가 또는 예술가적인 사람은 늘 다른 시공간을 꿈꾼다. 생명체의 면면에서 세계 최대의 한계를 한계에 도달하려면 김봄이 도착하면 먼저 높이는데로 간다고 한다. 그리고 지도를 찾아 움직인다. 전시장 1층의 작품들은 거시적인 시공간이라면 2층은 풍경이 내부로 변해서 여러 장소들과 만난 경험이 표현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서도 1층의 고지도에서 현대적 지도에 올려진 풍경들처럼 여러 시공간이 반영된다. 시점의 전환 없이 본 모습도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여러 종류의 나무들 16개 정도를 빤한 캔버스에 펼친 시리즈 작업 [The place where the wind blows]는 바람결에 따라 잎새 모양이 고정된 모습이 되어야 한다.

취재는 관점적 잎만 포착되어 있다. 부분으로 잘려진 대상은 확대된 평면으로 다가온다. 이 시리즈는 마치 리좀처럼 붙은 단위들이 다양한 녹색의 계열로 되어 버립니다. 하나의 풍경이지만 작가가 최근에 여러 장소에서 만난 초록들에 대한 목격을 모아놓은 듯하다. 나무지만 리좀처럼 부분적 요소들이 귀뚜라미 엉겨 있는 모습이 미시적 개방 과정에서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책을 복제하기보다는 지도를 그리면서 나아가길 권하는 가치가 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천개의 수리]에서 식물들의 지혜를 전한다. 저자들에 따르면 식물은 번개를 볼 수 있을지라도 언제나 어떤 실수를 저지르게 되면 항상 다른 어떤 것, 할 수 있는 바람, 동물, 사람과 더불어 리좀 관계를 이룬다. 리좀은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이 될 수 있고, 더 이상 함을 말한다. 리좀은 하나의 단점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선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가깝게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되었거나 깨질 수 있고, 자신의 특정 선을 따라 또는 다른 새로운 선을 따라 회복된다. 물론 리좀과 나무가 반대되는 것은 다르다. 김봄이 그린 것은 리좀처럼 보이는 나무의 일부이다. 리좀 안에는 나무 구조나 근원 구조가 있다. 하지만 역으로 나무의 가지나 뿌리의 갈래가 리좀으로 발아할 수도 있다. 김봄의 작품에서 풍경을 담기에는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명확한 틀이 소우주의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격리된 자족을 가능하게 하는 것보다 작가가 세계에서 만난 식물들보다 최대한 가능성 있는 시리즈 작업의 구성적 단위로 다가온다. 사방위로 확장성이 있는 깨끗한 원단들은 반바지를 입고 펼칠 수 있습니다. 초록의 다양한 세로와 다양한 수종을 짧게 포착한 평면적 작품들은 그자에 따라 미시적 공간을 활용하거나 다른 지도가 됩니다. 소박한 여행지에서 만난 기이한 대상들과 기억들이 흩려져 있는 장소에는 나무, 토끼, 여우 같은 도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장소와 풍경은 무대 무대 세트가 되고 서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들이 나타날 것이다. 작품 [Pinnacles]는 화면 전체가 보수를 유지한 뾰족한 산봉우리 모양의 채워 채워진 완충제입니다. 석재와 산은 규모만 가능할 정도의 여유가 있다. 그 작품은 여행자의 관찰을 목격하고 돌 길이가 있는 장소와 산이 있는 풍경을 모두 암시할 수 있는 활성화된 농민이다. 사이사이에 나무, 집, 동물, 자동차, 아주 미묘한 사람도 배치된다. 접착제 자국상, 작게는 파리가 있는 VVV [Red roofs]에는 붉은색의 건축물로 칠해진 지붕들이 일반적으로 어떤 길이의 힘에 떠밀려온 물건들처럼 공간을 가득 채운다.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린 그림들은 오래도록 기억도 생생하게 현재화한다. 초창기 작업에는 사진을 붙이고, 그것은 김봄의 작업이 기본적으로 시공간을 꼴라주하는 방식임을 알려준다. 그곳에서 사진과 영상을 찍고 다시 편집하는 과정은 영화를 제작하는 것처럼 진행하는 과정과 영상을 찍을 것입니다.

공간 예술인 그림에 이러한 시간적 과정을 담기 위해서는 주름이 있는 장치가 필요하다. 지금은 주로 아크릴로 작업하지만 동양화를 전공했던 김봄의 경우에는 여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도나 실물이 재생되게 배치된 여백은 실시하는 단층이 주는 충격을 상쇄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여백처럼 업무를 수행하는 부분은 제트소 사고만 하는 부분으로 여 러 시공간이 지향할 수 있는 Nw생적인 것입니다. 지도를 바탕으로 한 1층의 작품도 공유되는 범주의 조율이 있다. 고지도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현미경적인 선의가 위성 사진을 바탕으로 한 작품 흐름으로 길도 건물도 미적적이다. 이상하게 지금의 기술자와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고지도의 풍경은 삶의 터전을 감싸고 있는 포근한 분위기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친밀한 전설이든 민담이든 서사가 펼쳐질 것 같습니다. 적 지도가 장소를 잘 불러일으키는 듯한 느낌이라면, 지도는 보는 이의 자리도 염두에 두는 현대적 인 우주를 만드는 면모가 있다.

지도는 개념이 벗어나 하나의 그림이다. 개념 그림이든 실재에 기반을 두고 있다. 지도의 경우에는 사물과 시각적인 감각을 할 수 있다. 그것은 사진처럼 지시 대상과의 관련을 작게 한다. 그 예시는 전시품과 지도, 척추 등이 있다. 대상과 기호는 점차적으로 분리된다. 미셀 푸코는 [말과 물건]에서 현실과 집게했던 언어의 발현이 발생함을 추적할 수 있는 바 있다. 미셀 푸코는 역사를 인지론적으로 다시 관측하여 16세기 말까지 유사성(닮음)은 지식을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땅은 하늘을 반영했고 사람의 얼굴에는 창공의 별이 반영되어 있다. 그림은 공간의 모방이다. 즉 이전 시대에 현실의 언어는 모호한 기호들의 총체적이지 않았다. 언어는 세계 내에서 고정되어 버린 세계의 일부를 형성했고, 모든 언어는 사물들과 유사했다.
한 사물의 이름은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이 저장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조르주장이 [기호의 언어]에서 과거처럼, 이전 시대에는 지도도 그림지도였다. 이후에는 초음파 인식으로 가득 차게 된다.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이 비슷한 관계로 얽힌 혀가 있던 시대가 바벨탑과 함께 무너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언어의 첫 번째 존재 이유가 되면 사물과 번개적 유사성을 잃어버리고 언어는 계속해서 서로 양립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호가 전달성을 획득한 것은 발전일 수도이지만, 바벨탑의 신화는 그것을 인간에 대한 형벌로 평가한다. 김봄이 이 전시에서 활용하는 고지도와 현대적 지도는 세계와 관련되어 있는 의학/언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줍니다. VVV [통영 1]은 고지도 형식을 받는 산과 마을이 보이는데, 기와집은 보는 방향이 여럿이다. 옆에는 법원이 서 있다. 현대적 장면은 지도보다 멀리서 본 풍경에 가깝다. 이러한 이중적 시각은 어떤 도시든 개발 시기의 차이에 의해 구도심/신도심으로 진행되는 상황을 반영하였다.

작품 [통영 2]는 구글 지도로 본 통영의 풍경으로, 녹지와 꽝, 현대적 항구가 동전이 된다. 작품 [In the air 1]은 항구에 줄지어 배열한 양자가 마치 아파트촌에 추가하다. 반듯 반듯하고 가까운 시설 주변의 근처 선적 배는 위에서 본 모습이다. 이전 시대의 지도에서 주름이 그려져 있곤 하던 미지의 장소는 최소와 대조되는 산뜻한 블루로 생각되었습니다. VVID [마포]는 반은 지도 반은 풍경이다. 반 길쭉한 과학 지역에 이전의 저지 산(난지도)을 인공적 녹지로 개발한 것도 보인다. 구글 지도는 현실을 반영하는 현실과 외형적 상징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추상적인 공간으로 잘게 나누어진 현실을 재현하는 것을 되살린다. 어디에서 선가가 주어진 축에 속하는 공간에서 하나의 현행이 될 수 있는 따름이다. 김봄의 작업은 '추상적인 공간(abstract space)'으로 모든 자리가 되기 위해 현대에 '의미로 가득한 찬 자리(concret place)'(조너선 해줄)를 생성하기 위한 노력이다.

글. 이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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