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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호접몽을 유영하는 생명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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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미술비평 反我 김정현

호접란2_70x55cm_비단에진채_2022 [사진=한국화랑협회]
호접란2_70x55cm_비단에진채_2022 [사진=한국화랑협회]

 

-사막 물고기가 전하는 명령어

아름다운 진채로 물들인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있다. 비단 위의 2차원 평면에서 유유자적 하늘을 나는 물고기는 초현실의 가상적 존재다. 지구상의 물고기는 물속을 벗어날 수 없고, 중력을 거슬러 하늘을 날 수도 없다. 유영하는 자유는 화폭 속 예술에서나 허락될 뿐이다.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관객이 그림을 즐기는 이유는 이 잠깐의 허락된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서다. 이재은 작가의 물고기나 식물도 그렇게 출현했을 것이다. 작가는 사막 같은 적막한 장소에 생경한 자태의 초현실적 생명체를 띄워본다.

시멘트 보도블록 위를 뚜벅뚜벅 걷지 않는 인간, 지구의 중력에 사로잡히지 않는 우리, 작가는 자유롭게 떠도는 현대인을 상상했을 것이다. 이번 <?> 전시에서 사막 물고기가 전하는 작가의 은밀한 명령어에 귀 기울여 보자. “자유롭게 유영하라!” 도시의 무게를 견딜 필요가 없는 존재, 외력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되는 존재,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밀어낼 용기가 있는 존재, 이런 존재들이 부유하는 곳. 그 곳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직 필요한 것은 가벼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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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side Down’의 아슬아슬한 공존

2012년 후안 솔라나스 감독이 연출한 SF영화 <Upside Down>은 정반대의 중력을 갖고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두 행성이 주요무대로 펼쳐진다. 두 행성은 비밀의 숲이라는 장소해서 스치듯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을 뿐, 서로 다른 중력 때문에 서로 다른 행성 거주자들의 왕래는 좀처럼 쉽지 않다. 마치 나르시스가 극단적인 자기애에 심취해 목숨마저 잃어버리는 것처럼, 서로 다른 행성을 침범하는 것은 죽음을 담보로 한 아찔한 행위일 수밖에 없다. 영화 속 남녀주인공은 사랑이란 명분 아래 막강한 중력의 무게마저 견뎌내는 고행을 감내했지만, 그것은 SF영화라는 예술의 틀을 빌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재은 작가의 동명 작품 <Upside Down>도 서로 다른 중력에 영향을 받는 두 세계의 공존을 담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식물과 땅으로부터 올라온 식물. 이들은 화폭의 중간 지점에 마치 투명 거울이 있는 듯 맞대면을 하고 있다. 영화 속 비밀의 숲처럼 이재은 작가의 화폭 중간에는 우리의 눈에 되비치지 않는 경계지점이 존재한다. 경계는 구분을 낳고, 구분은 차이를 불러내고, 나아가 그 차이는 허물고 싶은 충동을 유발한다. 그래서 작가의 <Upside Down>은 폭풍전야의 적막감마저 일으킨다. 곧 어느 쪽에서든지 모래폭풍은 불어올 것이고, 어느 쪽이든 소멸의 사건은 일어나고야 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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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즘(Narcissism)에서 살아남는 쪽

그리스 신화 속 나르시스(Narcissus)는 물속에 비친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환영을 흠모해 그만 빠져 죽었다는 일화로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유명한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도 <나르시스>(1596-97)를 그렸고,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도 <나르시스의 변신>(1937)을 그렸다. 오랫동안 숱한 작가들이 나르시스를 주제로 명작들을 그려왔던 선례처럼, 2021년의 이재은 작가도 나르시스의 일면을 <Upside Down>에 담고 있다.

우리는 매일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한다. 너의 얼굴이 아닌 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깨끗이 씻어낸다. 매일 같이 대면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 자신이다. 그만큼 많이 들여다본 나 자신을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자기애의 출현 조건이다. 작가는 잡다한 일상으로부터 자유를 획득한 물고기나 식물로 자신을 투영하고, 비밀의 숲에서 은밀하게 마주하는 연인처럼, 화폭 중앙에 거울이미지를 대칭시킨다. 나르시시즘에 심취하기!

그러나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사막>이나 <중력> 작품에서 땅의 중력에 영향 받는 존재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살아남는 쪽은 하늘의 물고기고, 작가의 물고기는 결국 신화 속 나르시스의 행보를 따르고 있다. 저 너머 세계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의 징표는 <호접란>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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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접몽(胡蝶夢) 속 호접란(胡蝶蘭)

중국의 장자(莊子)는 꿈에 나비가 되어 실컷 놀다가 깨어난 후, 꿈속의 나비가 진짜 나인지 깨어난 지금의 인간이 진짜 나인지 모호하다고 설파했다. 그것이 일명 <호접몽>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점점 더 가상현실이나 메타버스(Metaverse) 시대로 급속히 빠져들고 있는 요즘, 장자가 만약 지금 시대로 점핑해 건너온다면 그는 자신의 선경지명을 자화자찬했을지 모른다. 그의 호접몽처럼 현실과 온라인 속을 오가는 우리는 경계를 명확히 구분 짓지 못한 채 부유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바타인가? 아니 인간이지?’ 우리에겐 낯설지 않은 오래된 의구심이다.

작가는 호랑이의 등선 위로 거꾸로 매달린 호접란을 그렸다. 호접에서 호(胡)자는 호랑이 (菟) 한자가 아니지만, 우리는 언어적 유희처럼 그것을 즐길 수 있다. 호랑이가 중력에 영향 받는 현실세계의 징표라면, 호접란은 저 세계로부터 노니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호접몽을 가상현실로 말할 수 있는 이 시점에서, 작가의 호접란은 무엇을 비유하고 있을까? 나비일까 인간일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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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슈탈트(Gestalt)의 균형감에 기대어

형태(形態)를 뜻하는 독일어 게슈탈트는 전체적인 통합의 구조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흔히 게슈탈트는 안정감 있게 균형 잡힌 형태를 의미한다. 종종 형태심리학 자체로도 쓰이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 전반에서 감지되는 형태심리학적 특징은 이러한 좌우대칭의 균형감이다. 화폭의 무게중심을 상하좌우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은 채 전체의 균형을 의식적으로 맞추려는 것이 작가의 공간지각 방식이다. 우리는 자신의 심리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모든 이미지를 재구성하려는 강박에 사로잡히곤 한다.

작가의 작품 앞에 서서, 중력의 무게로부터 자유를 만끽하는 물고기를 따라가 보고, 부유하는 식물의 리듬을 느껴보고, 풍부한 진채의 색감이 덧입혀진 안정된 게슈탈트를 감상해보는 순간, 그 순간이 허락된 것은 왜 이리 찰나일까! 작품과 짧고 강렬하게 마주하며 강박적인 자기애를 즐길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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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3.17(금)-2023.03.30(목)
Venue 갤러리초이
Address 서울시 마포구 토정로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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