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움직임
생명은 무엇보다도 움직임이다. 분열하는 차이(difference)와 포집하는 결속은 생명체에 움직임을 부여한다. 그 움직임은 형태 이전의 형태이고, 크기 이전의 크기이다. 히드라(hydra)와 같은 자포동물도, 선류(蘚類)에 속하는 작고 부드러운 이끼도, 나무와 꽃도, 인간도, 모두 이 움직임의 놀라운 분화체(分化體)들이다. 이때 모든 생명은 어떤 근원적이고 폭발적인 힘, 베르그송 철학의 언어를 빌리자면, 엘랑비탈(Elan Vital; 생의 도약)의 경이로운 힘을 근원으로 삼아 출현하게 된다. 엔트로피의 부정이 아닌 생성의 긍정으로서, 닫힘이 아닌 열림으로서, 엘랑비탈은 세계에 생명이라는 ‘흐름’을 부여한다. 시간을 느낀다는 것도 한편으로는 생명의 움직이는 기운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시간은 물질의 시간과 다르다. 물질은 외부로부터 가해진 어떤 힘에 따라 변화하지만, 생명은 자체적인 힘으로 끝없는 변화와 연속을 이루어 낸다. 생명현상은 ‘무질서도’인 엔트로피 법칙을 거스르는 특수한 현상이며, 물질적 흐름에 상반되는 시간성이다. 결국 생명은 긍정의 움직임이요, 분화하는 생성이다.
생명의 정신성
작가 주랑은 ‘생명’을 그린다. 코발트블루를 잔뜩 머금은 이 비정형 덩어리들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이 푸른 덩어리들은 모이면서 퍼지고, 잡힐 듯이 미끄러진다. 주랑은 형태를 그렸다기보다는 어떤 힘의 움직임을 그리고 있는데, 그 움직임은 마치 세포분열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은하수를 빼곡히 메운 뜨거운 가스층과 성간 구름 같기도 하다. 아름다움의 확대인지, 우주적 고독인지도 도통 알 길이 없다. 어찌 됐든, 이 덩어리들은 고정되지 않는 의미들로 유희하며 신묘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기계적인 인과성은 끼어들 틈조차 없다. 무수히 많은 탈주(脫走)만이 카오스(chaos)적 파동을 일으킬 뿐이다. 이 움직임이 추상인지 구상인지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모든 인간적 식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무릇 그 어떤 식별도 없으니 차별도, 갈등도 없다. 작가의 마음과 붓을 빌린 이 비정형의 덩어리들은 나누어지고 있는 총체성이고, 원초(原初)의 화합이며, 생명의 적나라(赤裸裸)이다. 어린 시절 과학 시간에 보았던 프레파라트(현미경 관찰을 위한 표본) 속 세상처럼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움직임뿐만이 아니다. 코발트블루의 깊고 진한 푸름도 ‘원초의 색’으로 손색이 없다. 일찍이 칸딘스키도 “푸른색은 깊어지면 질수록 인간을 무한(無限) 속으로 더 깊숙이 끌어들이며 순수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다가 결국은 초감각적인 것을 추구하게 만든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프랑스의 현대미술가 이브 클랭이 개발한 청색 IKB(International Klein Blue)은 물질의 초라함에서 비물질의 광활함으로 넘어가는 색이었으며, 괴테에게도 청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가진 기묘한 색”이었다. 물질의 외관을 벗겨낸 색으로 사용되는 작가의 코발트블루는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는 생명의 정신성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초감각적인 것을 향하여
작가는 이번에 신작을 대거 선보인다. 신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화면에서 여백을 많이 없앴다는 것이다. 화면에 파편적으로 그려진 단세포적 형상들과 차가울 정도로 희디흰 배경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화면에 생동감을 더했던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이번에는 화면 가득히 생명의 느낌을 채운 형국이다. 생명에 대비되는 죽음의 공허함을 지우려 한 것일까? 작가는 활성화된 생명체와 냉정한 여백 사이에 흐르던 날카로운 리듬감을 잠시 내려놓고, 생명의 충만하고 점진적인 확산을 또 다른 긴장의 힘으로 보여준다. 양치식물을 닮은 듯한 수많은 미시체(微示體) 사이에서, 그 출현 동기조차 쉽게 가늠할 수 없는 미지의 푸른 서클(circle)은 생명의 기운생동(氣韻生動)을 권력처럼 휘두른다. 이제 주랑의 그림에서 ‘형태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고, 생성의 떨림과 번짐만이 심리적 뉘앙스로 표상되고 있다.
형태의 의미로부터 한결 더 자유로워진 작가의 예술적 성숙이 반갑다. 우주적 느낌이나 초월적 흐름 안에서, 어떤 것을 결정된 의미로 가두려는 시도는 무의미할 뿐이지 않은가. ‘살아 있음’에 점점 더 무감각해지는 현실을 깨우기 위해 작가는 고된 붓질을 이어나간다. 그리면 그릴수록 실루엣은 무너지고, 생각하면 할수록 기억은 흐려진다. 꼭꼭 숨겨놓은 일기장처럼, 주랑의 그림들은 기록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흐려짐’을 보존한다. 이 흐려짐의 혼란 속에서도 분명하게 떠오르는 건 살아있다는 충만한 느낌과 코발트블루의 극적인 선명함이다. 이제 관객인 우리는 작가가 그리는 초감각적인 이미지들, 그 신비로운 생명의 몸짓이 우리를 유혹하게 내버려 두면 될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