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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한 자연으로 이끄는 소나무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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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를 소재로 하여 확고한 조형성을 획득한 작가로는 아무래도 허계를 꼽지 않을 수 없다. 물경 십여년 이상을 상회하는 기간을 거의 유일하게 소나무가 지닌 조형성 천착에 바친 그의 노력과 집념은 가히 그를 가리켜 '소나무의 작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으리만치 독자적인 회화세계의 구축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Fine House 

토요일이라 교통체증의 답답함을 한층 더 실감하면서 약속장소에 도착한 시각이 12시. 막 정오를 넘어설 때였다. 반포동 파인(Fine) 하우스, 그가 가르쳐 준 데로 어렵지 않게 찾을 수는 있었지만, 결국 건물의 몇 층인지를 몰라 다시 전화를 걸어서야 4층 그의 작업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1층 은 전세를 주고, 2층은 살림집, 3층은 같은 작가인 부군 박재호(경희대 서양화과 교수)씨의 작업실, 4층을 자신의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에 대해 그는 먼저 이야기를 들려준다. 16년간을 살아온 청담동서 8년전 이사와 마당이 있던 주택을 헐고 그 자리에 재건한 것이 지금의 Fine 하우스다. 이 새 건물을 짓기로 한 이유는 작업실 때문이었다. 

근 30여년을 작업해오며 학교연구실외에는 변변한 작업실 하나 가지지 못한 그로서는 때문에 부군과 의논하여 처음 건물을 짓기로 하고선 구조에서 실내장식, 최종적으로 건물의 이름을 짓는 것까지 손수 일일이 세심하게 돌볼만큼 애착을 갖고 지은 작업실이라, 자랑거리도 그만큼 많았던 터였다. 

작가 허 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을 듣거나 작품 스타일을 대하면서 쉽게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유는 흔히 여성작가에게서 찾을 수 있는 섬세하고 심약한 이미지보다 강하고 힘찬 화면과 실제로 그가 지니고 있는 면모가 아무래도 여성보다는 남성적 성향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시원시원한 말투,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로 빼거나 가리지 않으며, 궂은 일을 도맡아 하기로 유명한 그의 천성도 다른 여성 작가와 구별지을 수 있는 그만의 캐릭터를 형성하게 된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소나무 지키기, 15년 

'소나무의 작가'로 불리워질만큼 그의 작품에 확고한 소재로 등장하고 있는 소나무는 어제 는 소나무하면 허 계, 허 계하면 소나무라는 등식이 성립 될 만큼, 십수년을 소나무 조형화 작업을 추구해온 그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는 상징적 소재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의 지속 적인 소나무 사랑을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남편하고 외국에 나가 있을 당시 아무리 서양화를 한다고 하지만, 우리 정서에 맞는 것 을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뉴욕과 파리둥지를 한 80일간 다니면서 뭘 그릴 줄 안다, 하고 말하는 건 작가가 해야될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죠. 즉, 내 것, 내 것을 해야된다는 걸 터득하면서 소나무 작업을 굳히게 된 것입니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성과 아 주 밀접한 나무고 조형화하는데 얼마든지 가능하더라구요. 굳이 사생을 하지 않더라도 화면 의 필요에 의해 활성화할 수 있는 이점도 있죠" 

지금까지 8번의 개인전을 국내외에서 가진 바 있는 그는 오는 9월, 소나무 작품 20여점의 소품을 모아 인데코화랑에서 전시를 연다. 

그동안 100호, 200호가 넘는 대작들을 위주로만 작업해오던 그는 이번 소품전에 대해 주위의 권유로 색상과 설치, 모노톤 등에서 새로운 맛 을 낸다는 취지로 기획하게 된 것임을 덧붙인다.

전시준비로 바쁜 그를 대하면서 무엇보다 가정생활과 다양한 미술그룹 활동, 그 속에서 맡은 직책, 또 교수로서의 역할, 그 어떤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그의 강한 책임감과 의 지를 엿볼 수 있었다. 이는 앞으로도 그의 바쁜 일상을 짐작케 하는 사실이기도 했다. 

프로다운 작가와 교육자 정신으로 "유달리 책임감이 강한건 6남매의 맏이였기 때문일 거에요. 그리고 매사에 많이 노력했던 거두요. 또 부모님의 기대도 그만큼 크셨죠. 그러다가 중학교 입학하고서 미술시간이라고 직 접적으로 미술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서, 굉장히 기뻤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그림공 부하고 각종 미술대회에 참여도 하면서 다양하고 폭넓게 배울 수 있었죠." 

동덕여고 재학시절도 마찬가지로 미술의 기본기 등을 많이 섭렵할 수 있었고 그는 졸업 후 당시 여고 은사님들이 재직하고 계신 수도사대에 입학, 권옥연, 김홍수 선생님들로부터 열성적인 지도를 받으며, 그분들의 가르침을 통해 그는 작업 외에도 교육자로서 가져야할 책임감과 작가로서의 정신을 배우게 된다.학교 졸업 후 교직에 있으며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고 박교수를 통해 자신이 알지 못한 참신한 작업성을 발견하면서 그는 그때까지 화면에 군더더기처럼 붙어있던 미련 등을 떨쳐 낼 수 있었다고 밝힌다. 결혼당시 같은 화가라는 점에서 자유분방한 기질을 우려하셨던 부 모님의 생각은 그러나 역시 같은 화가이기에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부친의 결론에 힘입어 승낙을 받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곧 있으면 결혼 30주년을 맞이하게 될 그 는 현재까지 어려운 고비를 잘 넘기도록 곁에서 도와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교육은 또 다른 천직으로 삼아 막내아이가 국교에 입학하던 해 마침내 첫 개인전을 열고, 불혹의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 만학의 어려움도 이기고, 억척스러우리만치 작가로서 또 한가정의 주부와 교육자로서 1인 3 역의 역할을 허술함 없이 소화해낼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그의 프로근성 때문일 것이다. 

"모교인 동덕여고에서 교직생활하며 6번의 개인전을 가졌어요. 아마 그곳에 은사님이 계셨고 그분들이 위로와 용기를 북돋아 주셔서 그걸 계기로 자극을 받을 수 있었을 거예요. 내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것까지는 만족할 수가 없었죠. 내 것을 해야했고, 내 세계를 확보해야 했죠. 결국은 그 시절에 모든 미래를 걸게 된 겁니다." 

남편인 박재호씨는 작가로서의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남다르게 의지가 굳고 또 하고자 하는 것은 꼭 성취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품이죠. 작업 의 색채감각이나 구도잡는 것 등, 건실하게 자신의 것을 섭취해 나가려는 힘을 갖고 있어요. 보통 여성작가라는 보편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강하죠. 교육자, 작가 쪽 다 잘 해나가고 있어 요. 열정으로 나가는 성향이 짙죠." 작가로서의 자리를 중요시하는 것 못지 않게 그가 교육자로서 역할과 몫에 대해서도 중요 시하고 있음은 다음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동안 흔들림없이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교육쪽에 있었기 때문일 거에요. 그림을 모르 는 순수한 아이들을 접하면서 그들을 어느 길로 갈 수 있게끔 발견해 주고 이끌어 주는데 가장 순수한 입장이 돼야 되거든요. 항상 순수하고 새로와 지려고 애쓰고자 했던 데는 교육 의 힘이 컸던 것 같아요. 교육은 내가 가질 수 있는 또 다른 천직인 것 같습니다. " 

아이들 옷은 손수 지어 입혔던 억척스런 살림꾼 "그림을 안 했으면 뭘 했겠느냐는 질문에 여군이나 회사의 비서실장 등이 어울린다고 했 죠. 이 사람한테는 체계적인 일이나 남 보필을 필요로 하는 일등이 적합하다고 봐요." 박교 수의 말이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품으로 자신이 맡은 일 외에도 그는 많은 일들을 수렴하고 해결하기를 좋아한다. 취미로는 뭐든지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만큼 매사를 긍정적인 사고로 해석하고 뛰어드는 것도 역시 그다운 면모일 것이다. 그러면서 누 구 못지 않은 알뜰함을 보여 살림꾼으로 소문이 난 점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명절이 되면 남편의 제자들과 후배 등 수십 명의 손님을 하루에 몇 번씩 치러내는 일과 3 남매를 키우면서 어릴 적 아이들이 입었던 옷을 일일이 손수 만들어 입혔다는 사실에는 감 탄마저 하게 된다. 아무리 힘들고 고된 일이라도 찌푸리는 그를 쉽게 상상하기란 어렵기만 하다. 

아직도 많은 할 일을 남기고 이제 전시를 앞두고 있는 그가 여력을 다해야 할 일은 뭐니뭐니 해도 작업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하지만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작업준비를 한다는 건 그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에 더욱 힘들어지는 육체일 것이다. 언젠가 건강이 안 좋아 병원에 다닐 적에 그곳 원장의 말처럼 몸을 써먹기만 하고 보강을 안 했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니듯이… 하지 만 그의 마음속엔 어느 것 하나 허술할 수 없다는 근성이 베어있음을 알고 있다. 이러한 그 의 프로근성이야 말로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됐음을 알기에 '행여나'하는 생각이 야말로 괜한 우려일 것 같다. 

"우리 정서에 맞는 소재들은 아직도 많아요. 그런 것을 찾고서 조형화시키는 작업을 하려 면 아직도 할 일은 많기만 하죠." 역시 현재의 캐리어에 안주하고자는 기색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어떤 일도 게을 리하지 않으려는 그의 성품대로라면 그의 바램들은 모두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글. 김설류 (출처=한국문화예술위원회)

<편집자 주 : 미술평론은 독자들에게 미술 작품 이해도를 높이고 정보 전달을 위해 비상업적인 목적으로 제공하며 저작권은 평론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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