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 덜 이뤄진 세계를 위한 풍경

구글 선호 매체로 추가

낯선 풍경 A Strange Landscape - 김민찬展

▲ 김민찬, 장지에 혼합재료, 97x162.5cm x 2EA, (사진=갤러리 이즈)
▲ 김민찬, 장지에 혼합재료, 97x162.5cm x 2EA, (사진=갤러리 이즈)

프롤로그

 

덜 이뤄진 세계에 대한 가상의 풍경은 익숙한 것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낯설 수밖에 없다. 세상의 소음과 사회적 독소를 제거한 풍경은 스님의 정관처럼 소박하면서도 매끈하다. 상상의 풍경은 모든 사회적, 지구적 조건을 제거하고 오래된 먼지를 털고 순수했던 인연의 시작을 보여주려는 열림의 세계이다. 그림은 본원적인 세상을 꿈꾸고, 작가는 우주적 몽상의 해결을 위한 딜레마를 말하므로 ‘덜 세계를 위한 그림’이지 ‘더 세계를 위한 그림’이 아닐 수 있다. 본래의 자연의 모습을 그 깊이에서 바라본 상상력을 기반으로 재구성 되어, 아직 만나지 못한 풍경이나 개연성 있는 상황, 그리고 내적 시선으로 바라 본 세계를 구현하려는 의지 때문에 다소 공허한 느낌이 없지 않다.

그림은 부정적인 현실과 결부되어 인간 구원의 성스러운 가치와 관계하면서 내장된 어둠의 깊이와 메마른 환경, 희망을 상실한 현실을 진단한다. 적막한 풍경은 제도와 문명의 완전한 부정과 구원의 역사가 펼쳐질 장소로서 극단이 되고자하는 인간의 심정을 반영한다. 그러기에 잡다함을 정화한 뒤에 남는 존재의 본디 모습은 비애를 피해가기 어렵다. 깨끗한 세계는 그가 파악하는 파탄의 세계에 대한 반영이거나 소박했던 최초의 풍경 혹은 최후의 풍경이며, 우주적 무한성과 절대성에 이르려는 화가의 노력이 포함된 풍경이기도 하다.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말하려는 그림이라는 생각은, 불가능한 꿈의 시나리오이면서 낯설음, 혹은 이해를 방해하는 것의 앞선 지점에서 출발하려는 작가의 태도 때문일 것이다. 그림이기에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일 필요가 없으므로 모순임에도 극지대의 풍경을 원형으로 삼는 희망을 정화된 마음으로 우주를 대하려는 형식의 타당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다. 포기하는 자리에서 새로운 이치가 생성된다는 화엄세계의 깨달음이다.

미래에나 있을 법하거나 아예 일어나지 않을 상황을 작가는 우리에게 제시한다. 세계의 끝을 가정하는 작가는 지구는 결국 극한의 지대와 극난의 지대만이 남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결국 빙하와 사막의 지구가 뜨거움과 차가움이 공존하는 세계이자 원초적인 에너지로만 가득 찬 세상임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림 속 풍경은 정수만 간직한 가상적 환경이다. 적요한 풍경, 불모는 창조의 동력이므로 알몸의 자연에서 생명력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풍경을 비워둠으로써 우주의 생기를 더 잘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선(禪)적인 명상으로 완성된 죽음 이후 완전한 생명을 이끄는 조화로운 삶에 대한 전망임을 그림에 품어두고 싶어 한다.

결여의 형식

 

결국 김민찬의 풍경은 체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식의 풍경으로서 그리워하는 곳까지 닿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림 밖 욕망의 세상은 빠른 것은 더욱 더 빨라지려하고 번쩍이는 것은 더욱 더 번쩍이며, 화려한 것은 더욱 더 화려해진다. 작가는 자신의 불우함과 상관없이 이러한 부유한 현실에서 허망함을 본다. 아무런 위협이 없는 여유로운 삶이라 할지라도 극복해야 할 현실이 막중하면 현실은 사라지고 없다. 낙원은 회복이 불가능하면서 이제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삶이 곧 억압의 굴레임을 지각한 사람들에게 결여의 방식은 유일한 해방 공간이 될 수 있다.

현실이 아예 없거나 현실을 극복한 풍경에는 어두운 과거와 하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동물의 나지막한 움직임과 무기력함만이 공존한다. 평탄지 않은 세상은 뒤뚱거리는 펭귄의 모습과 닮아 있고, 침묵과 느림의 걸음으로 살아가는 거북이와 코끼리에게 동경도 회피도 아닌 심정을 반영한다. 생명은 반생명적 평형에 대한 거역 그 자체이면서 그 반생명과의 끝없는 교섭에 의해 유지되므로, 거기 있는 것들의 긍정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현실의 장벽을 뚫고 두 유토피아를 그린 인간의 역사가 지워진 먼 시간의 풍경에서 형체에 주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는 우주의 대융합처럼, 극한대와 적도의 다른 가능성인 만다라의 현기증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같은 공간에 대한 상상이 가능한 것은 세계와 우주에 대한 매 순간마다에 작가의 경건한 시선이 닿았음이다. 생명의 맥이 끊어진 공간은 우주의 본원적인 힘을 드러내기 위한 풍경으로, 자연을 개발하거나 그 이상의 개선까지도 가능하다는 인간의 오만한 입장을 표명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꿈과 절망이 어떻게 같은 모습을 지니는 가를 말하고, 빛이 어둠 속으로 확산되리라는 믿음을 재현하면서 기교 대신 정련된 자아를 투영하는 연출된 풍경으로 미래를 비출 숨겨진 빛의 세계를 갈무리하고 있다. 기법적으로는 장지라는 매체의 특성을 이용하여 아크릴로 채색함으로써 빛이 지닌 발색을 좀 더 확장시켰다. 날카로운 방법도 확연히 드러나는 주제도 없으나 기교를 초월하는 어떤 것은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잠재적 힘의 세계일 것이다.

모순된 풍경

 

한 개인의 슬픔이 하나는 빙하의 모습으로 또 다른 하나는 건조한 사막으로 드러난다. 얼음을 부수고 나아가도 뜨거운 사막을 만나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이제는 자연의 이치에 맡겨져 있음을 화가는 믿는다. 진정한 생명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황폐함과 결핍에 대한 인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풍경과 자아가 하나가 되고, 주체를 비우고, 유령처럼 존재하는 거북이와 코끼리, 그리고 펭귄은 좋은 시절을 대신하는 화가의 아바타일 것이다. 삶의 고통을 드러내고 문명의 폐허를 비판하기 위해 동원된 악몽의 풍경은 겉으로는 잔잔하지만 속으로는 출렁거리는 그의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청명함과 불투명함의 세계는 인간 존재의 보편적 비애다.

그는 미리 만들어놓은 설계에 따라 꿈을 꾼다. 하나의 꿈이 또 다른 꿈을 만나 상징이 되었고, 두 세계는 서로에게 먹고 먹힌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할 가능성을 얻는 것이다. 어떤 생명도 홀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두 개의 극단적인 세상도 서로를 흡수해야 새로운 우주로 탄생한다. 두 극단의 세계는 서로를 먹으면서 성장하므로 생명을 구성하는 동물들은 죽음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막힌 세상을 통하게 하는 극과 극의 만남이 오히려 생명의 낙원일 수 있는 것은 삶의 경계에서 체험하는 죽음은 그 자체로 삶의 한 형식이며 지금 이 자리의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성한 분노의 응어리는 사막이나 빙하로 풍경화 된다. 얼음덩이는 차갑게 식어 움직이지 않는 감정, 혹은 불모에 이른 생명력이며 어떤 방법으로도 탈출할 수 없는 일상의 삶이다며, 사막의 모래는 끊임없이 일렁이면서 변화하는 감정이다. 이 모든 것이 출구 없는 풍경이기에 서성거리지만, 고요함이 영원히 고요하지 않을 것이라 포기할 때의 모순을 넘어서는 해결책으로 화가는 세상의 미래를 제시한다. 미래는 현실 도피의 장소, 현실 정화의 형식이자 현실과 불화하는 자들의 그리운 은신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림으로 풀어 내지 못한 풍경의 모든 것을 작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 자연의 원리에 맡겨버린 듯하다. 물이 떠난 자리에 다시 샘물이 고이듯 언젠가 잃어버린 풍경을 복원해내기 위해서는 단정하고 분명한 기억들은 걷어 내야 할 것으로, 삶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 순결함에 이르기는 어려운 까닭이다. 인간을 고립에서 구원할 희망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환경에 관한 성찰로만 끝난다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환경을 그림처럼 그저 엄숙하게 바라보게만 할 뿐 시들어가는 삶을 치유할 활력을 느끼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생명이 수단으로 바뀐 현실에서 무덤만이 희망이라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현대예술은 도시의 삶과 그 감정의 사막에서 탄생한다. 굴(窟)은 당연히 빠져 나와야 하는 곳이지만, 세상 전체를 굴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용해야 할 힘이 내장 된 장소이기도 하다.

에필로그

 

손에 잡힐 것만 같은 풍경이 손을 펴보면 아무 것도 없다. 침묵의 그림, 어렴풋한 풍경, 막막한 침묵의 세계는 세상살이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는 인간적 한계의 인식과 고립감이 아닐까. 작가가 이미 알고 있거나 의도한 바일 수 있는, 다른 삶을 만들어 내기 위한 희망의 시스템으로서의 풍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일정 부분 자기만의 믿음의 세계가 있을 터인데, 김민찬에게 그것은 풀 한 포기의 생장조차 기대할 수 없는 침묵의 공간이자 질문의 공간이 되고 있다. 절대적 딜레마가 작용하는 극단적인 모습이지만 그곳은 우리 삶의 원형이 존재하는 공간, 자연과 인간이 서로를 보충하는 진경산수의 순결함이 아닌 파괴나 소멸 뒤의 가장 낡은 폐허의 공간이다.

그의 그림이 무의식의 몽상적인 세계이거나 허구적 풍경이기보다는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후미진 낙원이길 바라며, 그림을 믿는 만큼 앞으로 남게 될 힘겨운 책무에 대한 보편성은 우리 모두의 숙제로 남게 되리라 예감한다. 생명을 잠재적으로 가둬두고도 풀 한포기 뿌리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불모의 환경과 공존하는 모래 생물과 얼음생명체처럼 소박한 삶을 꿈꾸는 작가만의 독자적인 형식의 탄생에 대한 기대감 또한 버릴 수 없다.

글. 주성열(예술철학/미술비평)  (출처=한국문화예술위원회)

 

<편집자 주 : 본 미술 평론은 독자들의 작품 이해도를 높이고 미술 정보 전달을 위한 비상업적인 목적입니다. 저작권은 평론가에게 있습니다.>

관련 기사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 작성

0/2000

댓글은 검수 후 노출됩니다. 비방·욕설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