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화가의 탄생
조혜정은 화가이자 ‘엄마’이다. 그로테스크한 형상성과 신비로운 심미성을 지닌 개성 넘치는 현대미술가이면서, 누구보다도 가정과 육아에 충실한 행복한 엄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현실은 비범함과 평범함, 예술과 일상, 열정과 냉정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작업과 육아 중 어느 것이 더 예술적이고 어느 것이 더 열정적인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다. 매너리즘(Mannerism)에 물든 일상도, 싸구려 키치(kitsch)도 그리 나쁘게만 보이지 않고, 피로감을 이기고 힘껏 휘두르는 붓질도, 창작의 기쁨도 뭔가 이전처럼 개운하지만은 않다. 당연하다. 화가 조혜정은 엄마가 된 것이다.
세계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인 프랑스의 미셸 우엘베크(Michel Houellebecq)는 논란의 소설 ≪Platform≫(2001)에서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타인과의 관계를 못 견디게 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엄마라는 특별한 존재는 자식을 자신과 동일화하는 존재이며, 우리의 상식선에서는 자식을 타자화(他者化)할 수 없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어머니들도 그러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사랑은 타인과 타인 간에 이루어지는 여러 형태의 사랑을 아주 쉽게 초월해 버린다. 이 위대한 사랑 안에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극한의 상태로 타자화시켰던 한 여인의 처연한 사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삶을 선택한 타자, 초월적인 힘과 영겁(永劫)의 책임감을 동시에 부여받은 타자, 타자로서의 ‘엄마’는 그렇게 탄생한다. 이제 작가는 자신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화가라는 존재와 엄마라는 존재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어떤 방법도 배워 본 적이 없다. 삶의 열정을 불태우던 그림 앞에 매일 서보지만,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과 반쪽짜리 낭만을 어깨에 짊어지고 붓을 들 수밖에 없다. 화가는 그렇게 또 죽지 않고 자신을 표현한다. 아니,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 완전히 새로운 풍경을 보게 된다.
어긋나는 ‘나’, 미끄러지는 세계
조혜정이 그리는 풍경은 기묘하고, 신선하며, 비밀스럽다. 집안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아들의 장난감들도 마찬가지다. 작가에게는 이 플라스틱 세계도 하나의 비밀스러운 풍경이자, 차라리 심리적 억압에 가까운 것이다. 어두운 공간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빛과 형체, 나무 사이로 초현실화한 게슈탈트적 연상(聯想),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알 수 없는 언캐니(uncanny)한 장난감들, 해체된 색과 주름진 형태들로 이루어진 숲..., 작가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문명의 어법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미지의 장소이다. 그의 영상작업 <숲 정원>도 다소 ‘부드러운 정취’를 발산하긴 하지만, 이러한 미지의 신비로움을 내포하기는 마찬가지다. 실제적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몽환적인 그의 정원엔 말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시끄러운 영혼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름답고 유희적인 영상의 시퀀스(sequence)는 그저 탈주를 위한 하나의 미끼, 하나의 껍질로만 보인다. 그래서 <숲 정원>은 마치 우리를 어디로 인도한다기보다는 우리를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부터 멀리 떼어내려 한다. 미국의 현대미술가 매튜 바니(Matthew Barney)가 제작한 영화시리즈 <The Cremaster Cycle>(1994~2002)을 지배하는 신화적이고 몽롱한 정서가 오버랩될 정도로 조혜정의 영상 이미지는 익숙한 만큼 이질적이고 무의식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