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 아람누리미술관 갤러리누리에서 31명의 <다다익선> 전시가 새해의 막을 연다. 참여작가의 작품들을 둘러보는 중에 이토록 다름과 차이를 강하게 어필하는 경우도 매우 드물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들 작가들의 다양한 표현법과 제작노선들을 굳이 하나의 명제로 묶거나 제한하는 틀이 필요할까 싶어졌다. 각자 일정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지향해나간 방향이나 행동방침은 다르고, 이 다름이 당연히 정상일 수밖에 없다. 최근의 예술계에서라면 이런 차이들을 드러내 보임이 동일성의이 다름의 차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개인마다의 각양각색 취향이 더 충분히 표출된 탓이고, 더불어 다양한 감상자들의 상이한 취향도 더 만족스럽게 충족될 터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는 어떤 전시에서도 상이한 작품들 간의 관계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근접 미래에는 전시 감상 방법에 변화가 찾아올 것이다. 과거처럼 개별 작품 하나하나에로 환원해 들어가 그것의 내적 특수성 및 본질의 순수성을 밝히기보다, 작품 '바깥'에 대해 그리고 작품들 간의 관계에 대해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결국 예술작품의 힘은 다름 아닌 바깥의 힘, 그동안 간과해왔던 주변과 밖의 힘들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작품의 외재성과 작품 각각이 이웃 작품들과 맺는 상호관계의 성격을 설명하는 일도 꽤 유용한 일이 되리란 예측이다. 개별 작품의 자율성이란 것도 스스로의 힘만으로 구성해내는 것이 아님을 자각한다면,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바깥의 관계들로부터도 영향을 받는 그런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다다익선 多多益善”이란 전시제목에서,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뜻을 우선 음미해보고자 한다. 중국 고서인 《한서 漢書》의 내용 중 “한신전 韓信傳”을 펼치면, 한(漢)나라 장군 한신이 한고조(高祖) 앞에서 장수의 역량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한신은 자신이 병사의 수가 많을수록 더 잘 지휘할 수 있는 큰 그릇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말인즉 수학적으로 그 수가 크면 클수록 인간(적군)의 상상력이나 감정은 압도당한 나머지 스스로 물리적인 무력감을 자각하게 될 것이고, 반면 전투하는 아군은 더욱 힘을 얻어 승리에 대한 재빠른 확신의 전환에 이르리란 말이다. 근대까지만 해도 수학적, 역학적 힘의 상대적 압도-일종의 이접적(disjunctive) 관계의 전투인 셈-는 동서양을 넘어 널리 승인된 내용이다. E. 칸트 역시 자신의 《판단력비판》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상상력을 압도해버리는 숭고(sublimity)를 말한 적이 있다. 수학적mathematical 숭고와 역학적dynamical 숭고는 그 힘이 너무 많고 커서 우리를 압도해버린 결과 발생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칸트는 이 숭고감정이 썩 유쾌한 일로 시작하진 않으나 그 불쾌가 곧 쾌로 반전됨을 강조했다. 대상에 대한 반감에서 매혹(호감)으로의 전환이라는 마음의 움직임을 지적했던 것이다.
분량과 힘으로 승부를 거는 일은 나름 일리가 있다. 이번 전시 작품들의 다양성과 이질성의 크기, 차이의 힘은 상당하다. 칸트의 숭고론의 설명에서처럼, 관객은 작품들 간의 상당한 차이의 혼재 앞에서 멈칫하며 혼란스러운 감정을 체험하고 내심 숨고르기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긴장한 감상자들께서는 작품들 안으로 파고들어가 어떤 이해의 실마리라도 잡아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일관성이 결여된 다양한 작품들의 연이은 배열 앞에서 느슨한 마음으로 무위로운 차이의 향연을 향유하시면 더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 불현 듯 작품들에 대한 서먹한 반감에서 벗어나 상상력의 진동 속에서 매혹으로 혹은 쾌감으로의 반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다다익선”의 전시 명제로 되돌아오자.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원형 로비로 가면, 백남준의 거대한 바벨탑 모양의 비디오아트 설치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제목인 “다다익선”은 무려 1003개의 브라운관 TV 모니터의 집적(accumulation) 구조에서 나왔다. 물론 제작의 계기가 전 세계인들의 축제 올림픽 개최년도인 1988년을 기념하고, 동시에 10월 3일(10-03) 개천절-하늘이 열린 그래서 한민족의 시원인 날-을 기념하기 위해 비롯됐던 것이지만, 천 여 개의 모니터 집적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좋다”는 뜻을 한 눈에 그대로 확인시켜주는 매우 의미심장한 케이스이다. 총 1003개 티브이 모니터들이 투사하는 상이한 영상들은 지구촌의 온갖 다양한 전파 신호들을 차별 없이 수신한 결과이며, 세상의 모든 전자매체들의 전파신호를 받는 수신탑으로, 우열의 구분과 거리두기 없이 무작위한 정보 소통과 공유가 새로운 시대의 정신임을 거듭 확인해주는 것이다.
이 같은 ‘다다익선’의 비유는 나아가 동시대 전위예술의 옹호자이자 비평이론가인 아더 단토(Arthur Danto)의 ‘다원주의 pluralism’ 개념을 환기시키기도 한다. 특히 ‘예술의 종말’을 선언한 것으로 유명한 단토는 ‘예술의 정의’ 논쟁을 촉발시키면서 예술을 어떤 미학적·형식적 특징으로 제한할 것이 아니라 경계 없는 다양한 차이의 활동들로 규정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의 다원주의란 열린 예술개념이 나온다. 단토의 다원주의는 예술이 규범적으로 어떠해야 한다는 제약이 사라졌음을, 그래서 예술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던진다. 곧 새로운 예술의 시작, 동시대 예술의 해방 선언이자, 수많은 예술활동을 제한하던 족쇄가 풀린 셈이다. 하지만 단토의 다원주의의 문제점은 예술가가 과연 어디까지 제작활동을 해도 좋은지, 자유방임의 한도는 어디에 있는지 하는 애매함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들의 작업을 철학에 종속시켜버리자는 단토의 궁극의 해결책은 매우 부담스럽다. 다원주의 예술이 과거처럼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 이해돼선 안 되며, 표상과 실재, 재현과 진실의 관계를 묻는 철학적 사고를 요구하는 실험이라든가, 작품에 ‘구현된 의미’를 파악하는 철학적 비평의 과제임을 주장한 지점에서 우리는 단토의 다원주의를 벗어날 수밖에 없겠다. 강제보다 더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다다익선”의 테마를 다시 포괄적인 다원주의 의미로 선회시켜 이해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예술계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겠다는 확장적 입장을 주목해보자는 말이다. 개인의 취향, 관심, 신념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철칙 중 하나이다. 동시대 사회는 개인과 집단(공동체) 차원에서 상이한 인식과 의견을 구현하는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진다. 다른 존재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하는 배려가 존중되어야 한다. 타자는 틀리고 나만 옳다는 '배타주의'나 다른 존재들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이기적 우월주의(다른 말로 자기동일화)는 ‘다다익선’이 추구하는 다원주의와 반대되는 개념들이다. 다원주의는 말 그대로 다른 존재의 타자성과 이질성, 다름과 차이 자체를 온전히 인정하는 것이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 그리고 종교가 공존하는 글로벌 시대에 다원주의는 후기구조주의,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의 사유들에서 뿐 아니라 정치다원주의, 문화다원주의 등을 통해서도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존재하고 있다.
이 같은 다원주의 개념들 안에서 우리는 ‘다다익선’이 보여주고자 하는 문화예술의 혼재를 인정하고 서로의 차이와 성향의 다름을 존중하는 미적 태도를 지녀야 한다. 어느 하나가 앞서 있고 우월/열등하다고 선을 긋지 말아야 하며 재단하듯이 평가하지 않아야 한다. ‘다다익선’ 전시에 선보인 모든 작품들이 동등하게 가치있다고 말할 수 있는 다원주의의 의견이 필요하며, 평등을 강조하는 태도, 즉 자신의 것과 다른 다양한 경험, 행동원리, 제작태도, 미학, 문화, 사상, 신념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현재의 포스트모던 미술계에서 절실하게 경계해야 할 극단주의와 진영논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한 덕목이기도 하다. 또한 다양한 미적 입장들이 상호 충돌하고 갈등과 이견 속에서 종합되는 오늘날 예술세계에서 우리가 갖추어야 하는 자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다원주의를 포용할 때, 우리는 다시금 ‘무엇이든지 예술이 될 수 있는가’라는 한없는 느슨함이란 난제에 봉착하고 만다. 그렇기에 다원주의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각자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관계에 대한 사유의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J.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을 참조할 수도 있고, J.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개념을 그리고 G. 들뢰즈와 M. 푸코의 ‘차이’ 개념 나아가 ‘다르게 생각하기’나 ‘밖으로부터의 사유’ 전략을 선택적으로 참조할 수도 있다. ‘다다익선’ 전시작품들은 서로 사뭇 이질적이고 비관계(non relation) 속에 있지만, 갤러리누리의 시공간을 통해 어떤 유의미한 관계를 발생시키고 있다. 하여 이 비관계의 관계 생성과 양태를 주목해보길 바란다.
전시작품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관계의 공통적 속성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이 말한 이접적 종합과 연접적 종합이다. 이접적 종합(disjunctive synthesis)은 두 개 이상의 개별 작품들 사이 결합이 이것인지 저것인지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문제를 두고 이루어지는 종합이다. 즉 이것이냐 저것이냐 혹은 이것이든 저것이든 (or ... or)의 상호 관계로 사유하거나 공감할 수 있는 결합이다. 연접적 종합(conjunctive synthesis)은 작품들이 수렴하여 어떤 단일한 결과에 이르는 방식이다. 즉 이러저러한 개별 작품들이 있고 이것들이 어떤 하나의 귀결점으로 응집된다는 종합이자 그리하여 그것은 ... 이다라는 상호 관계를 연상시키는 결합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불일치의 일치 속에서 서로를 한계로 내몰고 그런 가운데 새로운 종합 즉 새로운 일치를 일으키면서 인식의 재탄생에 이르는 생성적 개념을 구성했다. 마찬가지로 이번 ‘다다익선’ 전시에서도 각 작가들의 작품은 완전히 따로따로 가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감상자의 감각을 통해 이접(=분리)의 종합을 혹은 연접(=연결)의 종합을 이루면서, 특이한 센세이션의 힘의 상관관계를 드러낸다. 그리고 작가들은 이 힘의 상호작용과 관계 속성을 감상자가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전시장의 작품 배열과 작품들 간의 관계 생성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개별 작품의 내적 완결도를 말하지 않는 필자의 의도를 부디 잘 읽어주시길 바라며, 동시에 작품 실현의 외재성에 중점을 둔 이 글의 방향을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린다.
글. 서영희(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