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수묵화와 서양의 유화는 재료가 전혀 다르다. 수묵화는 물을 이용하고 유화는 기름을 이용해 그린다. 수묵화와 유화가 서로 다른 것은 재료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일이다. 물과 기름이라는 이질적인 재료의 차이만큼이나 표현된 이미지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그림의 표현양식을 하나로 통합할 수는 없을까.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이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표현형식이 나올 터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서양의 회화 양식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작가들 사이에서 계속되어왔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기도 하다.
김흥숙도 그 대열로 뛰어들었다. 그는 유화물감 대신에 아크릴물감을 사용해 산수화와 유사한 풍경을 그린다. 다시 말해 아크릴물감으로 수묵산수를 표현한다고 요약할 수 있다. 얼핏 수묵이나 아크릴물감은 수용성이라는 점에서 일단 공통성이 있으니, 그럴 수 있으려니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의 작업에서는 수용성이라는 공통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표현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수묵화는 먹이라는 재료를 물로 용해해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린다. 반면에 아크릴화는 물감을 물과 혼합해 캔버스 위에 그린다. 수용성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한지와 캔버스는 소재 자체가 다르다. 수묵화는 검은색 물감을 중심으로 하여 담채를 곁들이는 정도이고, 아크릴화는 다양한 원색의 물감을 사용한다.
동서양의 서로 다른 회화 양식을 통합하려는 그의 시도는 장르의 붕괴가 보편화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두 가지 표현양식의 장점을 취함으로써 이전에 볼 수 없는 새로운 조형세계, 즉 독자적인 형식을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에 그렇다. 그는 아크릴물감과 캔버스를 사용하면서 수묵산수화 기법을 차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따라서 수묵 대신 다양한 색채로 이루어진 아크릴물감을 사용함으로써 수묵산수에 근사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에 따라서는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를 연상케 하는 산의 모습도 눈에 띈다. 뾰족한 기암괴석들로 빼곡히 채워지는 <금강전도>처럼 조밀한 산봉우리들이 군집하는 형태의 산 그림이다. 하지만 산봉우리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니다. 뾰족한 바위들로 가득 채우고 있음에도 그 형태는 명확하지 않다. 형태가 선명하지 않아 불분명하고 모호하다. 특히 2020년의 <경계를 넘나드는 공간> (162.2x130.3cm, Acrylic on canvas)은 겸재의 <금강전도>와 흡사한 구도인데, 전면회화에 가깝다. 크기가 거의 일정한 바위 봉우리들이 밀집한 상태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풍경이 존재하지 않을 터이나, <금강전도>가 말해주듯이 수많은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자리하고 있는 금강산을 함축적으로 묘사하는 데는 가장 적절한 구도이지 싶다.
물론 그의 경우에는 작품에 따라 바위 봉우리 사이사이로 공간이 열리는 등 다양한 구도의 작품이 존재한다. 어떻든 유사한 크기의 바위 봉우리들로 채워지는 작품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지닌다. 바위 봉우리들이 앞서거나 뒤서거니 하는 장면에서는 장엄한 바위산의 힘찬 기세가 느껴질 정도이다. 그 기세는 어쩌면 산의 정령들이 발산하는 생명의 파동인지 모른다. 바꾸어 말해 뭇 생명을 품 안으로 거두어들여 내뿜는 대자연의 힘찬 맥박이다. 그의 조형적인 목표가 수묵산수화와 마찬가지로 기운생동이라면 그 실체에 근접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의 작업은 소재에 따른 두 가지 형식이 있다. 하나는 산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물 그림이다. 이 두 소재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그림이 수묵산수화인데, 그 또한 수묵산수의 전형적인 구성 및 구도를 따른다. 산만을 소재로 한 경우에는 전면회화 방식의 구도와 더불어 마치 치고받을 듯 기세등등한 산봉우리가 시선을 압도하는 작품도 있다. 어떤 형태 어떤 구도이든 산 모양이 다를 뿐 그 전체적인 인상은 다르지 않다. 산 대신에 수련으로 연상되는 물의 이미지가 중심인 작품도 있다. 물이 있는 그림에서는 바위가 물에 잠긴 채 섬처럼 서 있는 듯싶기도 하다. 이런 작품은 바위산과 물이 어우러지는 전형적인 수묵산수화의 구도를 빼닮았다.
이렇듯이 산과 물이 있는 작품은 그대로 수묵산수의 이미지가 오버랩한다. 다만 선묘 중심의 수묵산수와 달리 표현적인 이미지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의 작업은 표현행위 및 그 과정을 중시하는데, 표현행위 자체가 결과물에 이르는 요체인 까닭이다. 작업의 최종단계에서는 수묵산수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자유로운 표현행위가 이어진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드러내겠다는 의지는 감춘 채, 작업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미적 감흥에 심신을 맡긴다. 여기에서 무의식적인 행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구체적인 형태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기에 자율적인 의식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며, 신체적인 반응 또한 여기에 호응한다.
이러한 표현행위를 주도하는 것은 심상이다. 마치 안개 속을 헤매이듯 마음속에 어렴풋이 그려지는 상을 좇아가면서 작업한다. 심상을 따르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표현행위의 자율성을 보장한다. 형태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상상의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며 그 순간에 일어나는 감정에 순응한다는 뜻이다. 물감을 칠하고, 지우고, 또 덧칠하는가 하면 긁어내거나 물감이 흘러내리도록 내버려 두거나, 흩뿌리는 등 다양한 기법으로 화면을 채워 나간다. 이러한 행위가 이어지면서 캔버스의 소재는 사라지고 물감의 이미지가 겹겹이 쌓여 질감이 형성된다. 그 질감은 유화의 진득함이나 두터움과는 다를지언정 캔버스의 존재를 지울 만큼의 색층을 형성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