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개인전 <Blue Hole>은 내가 김유림 작업을 처음 만난 시점인데, 제목에 적힌 Blue를 출품작들과 유심히 연결시키면서 보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니스처럼 파란 바다에 에워쌓인 해안도시를 소품에 담은 작품을 모은 전시였던 데다가 2014년 연말에 열린 2회 개인전의 전후로 어떤 작업이 전개되었는지 알지 못했던 탓에 개인의 여행기록화 정도로만 생각했다.
당시 개인전 제목에 포함된 파란색은 김유림을 구성하는 몇 개의 일관성 중 단연 독보적인 키워드라는 걸 후일 알았다. 다른 일관성 가운데에는 숲, 3면 이상의 다면회화, 외길 등을 고를 수 있겠다. 이번 전시 출품작이 모두 3개 이상의 캔버스를 연결해 숲을 그렸는데, 그림 속 숲이 제주 사려니숲길이라는 걸 작품 제목을 확인하기 전까진 알아채기 어렵다. 미디어나 방문자 개인이 찍은 기념사진들이 보여주는 사려니숲길은 촘촘하고 빼곡한 삼나무 침엽수림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그것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려니숲의 천편일률적인 이미지 혹은 객관화된 이미지는 나무들이 올곧은 기둥처럼 솟은 초록색 장관에 가깝다. 큰 숲과 대비되는 작은 방문자의 모습은 사려니숲길이 표방하는, 현대인을 치유하는 힐링이라는 판촉과도 연결된다. 김유림에 숲은 단번에 삼나무 침엽수림처럼 보이질 않으며, 인적 없이 숲만 단독으로 화면 가득 채우는 식으로 출현한다. 김유림의 사려니숲 혹은 숲 그림은 기대되는 객관적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전적으로 개인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의 풍경화다.
풍경화 전통은 낭만주의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도시인의 자연에 대한 향수와 자연의 아름다운 볼거리에 방점을 둔 픽처레스크 풍경화와 자연 앞에 나약한 인간을 강조하려고 자연을 숭고의 대상으로 묘사한 경우로 크게 나뉜다. 김유림의 숲 풍경화는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이라는 두 범주에 넣어 이해할 수 없다. 그녀의 풍경에는 개인의 감정 투사가 나타나는 것 같다. 주관의 풍경화. 단일한 색채와 엮인 미술 작가는 각인 효과가 생긴다. 자신이 고안한 파란색에 특허신청까지 한 이브 클랭의 경우가 아니어도, 빨간색 노란색 흰색 등 단일한 색채와 연결되는 미술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색은 화려한 수사법보다 몇 갑절 강력한 전파력과 각인 효과를 갖는다. 세계인이 약속한 것도 아님에도 분홍은 여자와 파랑은 남자와 연관되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쓰인다. 각 색채가 지닌 성질을 연구한 역사는 길다. 괴테는 말년에 1790년 시작한 초고를 무려 20년 가까이 첨삭해서 완성한 저작이 있는데, <색채론 Zur Farbenlehre>(초판 1810)이 그것이다. 그는 책에서 노랑과 파랑을 양축으로 두고 노랑을 긍정과 밝은 성품으로, 파랑을 부정과 어두운 성품으로 연결 지었고 자기 이론을 기반으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1774)에서 실연으로 권총 자살하는 주인공 베르테르를 파란 재킷 차림으로 등장시켰다.
미술가로는 칸딘스키가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1911)에서 목차의 한 장을 색채이론에 할애했다. 노랑과 파랑을 대비시킨 점은 괴테와 같다. 괴테와 칸딘스키가 색을 인문학적 사유로 풀이했다면, 과학적 검증으로 색채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후대에도 계속됐다. 1990년 이뤄진 색과 생리 및 심리 반응에 관한 공동 연구에선 빨간색이 교감신경계를 자극하고 혈압을 불규칙하게 하는 반면, 파란색은 평온을 유지시키고 집중을 보조한다고 소개되었다. 이런 숱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색채치료는 통상 사이비과학으로 폄하된다. 색채치료의 성공사례가 부풀려졌고 환자의 기대심리에 의존한 치료, 즉 플라시보의 혐의가 크다는 지적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