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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파란색 주관의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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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st, Blue - 김유림展 Kim Yurim Solo Exhibition :: Painting

▲ 김유림, 사려니숲블루5182 x 195cm, Acrylic on Canvas, 2022
▲ 김유림, 사려니숲블루5182 x 195cm, Acrylic on Canvas, 2022

 

8년 전 개인전 <Blue Hole>은 내가 김유림 작업을 처음 만난 시점인데, 제목에 적힌 Blue를 출품작들과 유심히 연결시키면서 보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니스처럼 파란 바다에 에워쌓인 해안도시를 소품에 담은 작품을 모은 전시였던 데다가 2014년 연말에 열린 2회 개인전의 전후로 어떤 작업이 전개되었는지 알지 못했던 탓에 개인의 여행기록화 정도로만 생각했다.

당시 개인전 제목에 포함된 파란색은 김유림을 구성하는 몇 개의 일관성 중 단연 독보적인 키워드라는 걸 후일 알았다. 다른 일관성 가운데에는 숲, 3면 이상의 다면회화, 외길 등을 고를 수 있겠다. 이번 전시 출품작이 모두 3개 이상의 캔버스를 연결해 숲을 그렸는데, 그림 속 숲이 제주 사려니숲길이라는 걸 작품 제목을 확인하기 전까진 알아채기 어렵다. 미디어나 방문자 개인이 찍은 기념사진들이 보여주는 사려니숲길은 촘촘하고 빼곡한 삼나무 침엽수림으로 통일되어 있는데 그것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려니숲의 천편일률적인 이미지 혹은 객관화된 이미지는 나무들이 올곧은 기둥처럼 솟은 초록색 장관에 가깝다. 큰 숲과 대비되는 작은 방문자의 모습은 사려니숲길이 표방하는, 현대인을 치유하는 힐링이라는 판촉과도 연결된다. 김유림에 숲은 단번에 삼나무 침엽수림처럼 보이질 않으며, 인적 없이 숲만 단독으로 화면 가득 채우는 식으로 출현한다. 김유림의 사려니숲 혹은 숲 그림은 기대되는 객관적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전적으로 개인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의 풍경화다.

풍경화 전통은 낭만주의기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도시인의 자연에 대한 향수와 자연의 아름다운 볼거리에 방점을 둔 픽처레스크 풍경화와 자연 앞에 나약한 인간을 강조하려고 자연을 숭고의 대상으로 묘사한 경우로 크게 나뉜다. 김유림의 숲 풍경화는 아름다움이나 숭고함이라는 두 범주에 넣어 이해할 수 없다. 그녀의 풍경에는 개인의 감정 투사가 나타나는 것 같다. 주관의 풍경화. 단일한 색채와 엮인 미술 작가는 각인 효과가 생긴다. 자신이 고안한 파란색에 특허신청까지 한 이브 클랭의 경우가 아니어도, 빨간색 노란색 흰색 등 단일한 색채와 연결되는 미술가를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색은 화려한 수사법보다 몇 갑절 강력한 전파력과 각인 효과를 갖는다. 세계인이 약속한 것도 아님에도 분홍은 여자와 파랑은 남자와 연관되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쓰인다. 각 색채가 지닌 성질을 연구한 역사는 길다. 괴테는 말년에 1790년 시작한 초고를 무려 20년 가까이 첨삭해서 완성한 저작이 있는데, <색채론 Zur Farbenlehre>(초판 1810)이 그것이다. 그는 책에서 노랑과 파랑을 양축으로 두고 노랑을 긍정과 밝은 성품으로, 파랑을 부정과 어두운 성품으로 연결 지었고 자기 이론을 기반으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1774)에서 실연으로 권총 자살하는 주인공 베르테르를 파란 재킷 차림으로 등장시켰다.

미술가로는 칸딘스키가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Über das Geistige in der Kunst>(1911)에서 목차의 한 장을 색채이론에 할애했다. 노랑과 파랑을 대비시킨 점은 괴테와 같다. 괴테와 칸딘스키가 색을 인문학적 사유로 풀이했다면, 과학적 검증으로 색채이론을 정립하려는 시도는 후대에도 계속됐다. 1990년 이뤄진 색과 생리 및 심리 반응에 관한 공동 연구에선 빨간색이 교감신경계를 자극하고 혈압을 불규칙하게 하는 반면, 파란색은 평온을 유지시키고 집중을 보조한다고 소개되었다. 이런 숱한 연구에도 불구하고 색채치료는 통상 사이비과학으로 폄하된다. 색채치료의 성공사례가 부풀려졌고 환자의 기대심리에 의존한 치료, 즉 플라시보의 혐의가 크다는 지적 때문이다.

실제로 색채이론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다. 1890년 이래 성인 대상 색선호도 조사에서 단 한 차례도 1위 자리를 놓친 적이 없는 파란색은 정치적 우파의 상징색이며, 만족 고요 조화 안정 등과 연관된다고 설명되며 이에 많은 이가 동의하면서도 파란색이 또한 우울감과 고독감을 표현하는 색에 쓰인다는 걸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해한다. 모든 색마다 고유한 성질이 있는 건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수용자의 기대심리에 따라 성질은 정반대로 바뀌어 쓰이기도 하는 게 색채이론이다.


내가 처음 김유림의 작업을 접했던 2014년 두 번째 개인전처럼 김유림의 파란색은 파란 바다와 파란 하늘이 지배하는 여행도시 베니스를 선택해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다가, 이후로 파랗다고 단정할 수 없는 대상마저 자신의 주관적 필터로 파랗게 물들인다. 비에 젖은 노면처럼 보이는 빛나는 코발트블루 아스팔트가 도시의 차가움을 표상한 2015년 연작 <Nowhere Blue>는 그림 속 푸르른 아스팔트를 보기에 따라 비에 젖은 아스팔트의 효과인 것처럼 관객이 색감을 주관화시키게 만든다. 이 같은 작가의 주관적 필터링에도 불구하고 외부 관객은 거의 눈치 채지 못하면서 김유림 주관의 풍경화에 동화된다. 그녀의 숲 그림은 파랗다. 혹은 거의 파랗다. 어둡게 묘사된 그녀의 숲 그림이 검푸른 숲이라는 세간의 표현과도 통하기도 하고, 교통신호등의 녹색 조명을 파란불이라고 스스럼없이 합의하는 오랜 언어문화와도 통해서, 녹색이 아닌 파란색 숲은 주관적이되 어색하지 않다.

이번 전시 출품작 8점 중 4점 정도가 일점투시원근법으로 숲 안에 난 길을 묘사했지만, 김유림의 그림에서 (외)길은 작품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일관성 중 하나로 보인다. 2017년에는 풍경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외길만 모아놓은 파란 풍경화 연작을 제작했는데 연작 제목을, 그림이 보여주는 것처럼 <완벽한 고독Complete Solitude>이라 붙였다. 황량하고 광활한 대지를 뚫고 시원하게 종심 깊게 뚫린 도로 그림이다. 파랗게 물든 숲 그림이 작가의 감정이 투사된 주관의 풍경화이되 외부인도 자연스레 동화된 것처럼, 숲에 난 외길에 작가가 유독 눈을 둔 그림들 혹은 숫제 인적 없이 황량한 외길만을 그린 연작들(Complete Solitude)에선, 결정적인 순간에 홀로 직면하는 게 삶이라는 진실과 맞닿으리라 본다.

이번 전시에선 캔버스 3개를 이어붙인 삼면화가 기본 포맷이고, 최대 8개의 캔버스를 위아래로 이어붙인 다면화까지 출현한다. 캔버스를 두 개 이상 이어붙인 다면화는 중세 초기기독교 미술부터 프란시스 베이컨 같은 현대 화가까지 개별 패널마다 독자적인 이야기를 담고, 각 패널들을 연결시켜 큰 이야기를 만드는 유기적 구성을 위한 묘안인 경우가 많다. 반면 공교롭게 초대형 다면화의 대상을 큰 나무 혹은 숲을 재현하는데 사용한 데이비드 호크니는 그림의 부피를 확장하려고 캔버스를 이어 붙였을 게다. 규모에서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유림의 숲 다면화는 이 경우에 가깝다. 추가로 확장된 화폭은 파란 밀도를 연장시키려는 작가의 욕구가 투영된 것일 게다.

글. 반이정 미술평론가

 

<편집자 주 : 미술평론은 독자들에게 미술 작품 이해도를 높이고 정보 전달을 위해 비상업적인 목적으로 제공하며 저작권은 평론가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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