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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름, '재일조선인 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의 표현활동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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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조선인 미술사 발굴학자 백름

백름
백름

그동안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재일조선인 1~2세대의 미술사를 발굴해 책으로 펴낸 이가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재일조선인 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의 표현활동의 기록>의 저자 백름이다.

그가 책을 펴내기 전까지 일본 미술계는 물론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1~2세대 미술가들의 활동과 치열했던 예술혼을 온전히 정리한 작업이 없었다. 백름 작가는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그들의 작품에 제대로 된 ‘주소’를 부여하는 작업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라 말한다.

한일관계가, 또 북일관계가 갈등을 겪을 때마다 그 피해를 고스란히 입은 이들이 바로 재일조선인이다. 코로나가 악화되는 시기에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정부의 차별적 방역지원 배제, 일부 우익 세력의 헤이트스피치에 시달려야 했다.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은 오랫동안 차별과 배제의 대상으로 살아왔다. 

이들 재일조선인 1~2세대 중에는 일본에서 살아가며 겪는 차별과 고난,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분단된 조국을 향한 사랑을 화폭에 남기기도 했다. 기록이 기억을 되살린다는 말처럼, 이들은 미술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질감을 선명하게 남겼다. 덕분에 우리는 뒤늦게나마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서 어떻게 살아냈고, 또한 살아가고 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백름은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발굴한 학자다. 그는 이러한 연구 업적을 평가받아 지난해 한국에서 김복진상을 수상했다. 김복진상은 서구 근대조각을 한국에 정착시켰고,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토월회, 카프를 주도한 작가 김복진을 기리기 위해 2006년 제정된 상이다. 작년 일본에서 출간된 그의 책 <재일조선인 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의 표현활동 기록>은 올해 하반기 한국에도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재일조선인 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의 표현활동의 기록' 삽화
'재일조선인 미술사 1945-1962, 미술가들의 표현활동의 기록' 삽화

 

“199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아름전’이 계기였다. 재일조선인 2세~3세들이 준비한 전시에 1세대 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작품이 있었다. 재일조선인 1세대의 작품을 처음 봤다. ‘내가 재일조선인임에도 동포들의 작품을 여태까지 모르고 살았구나’라는 부끄러움과 ‘왜 이들의 작품이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동시에 갖게 되었다. 그때 가졌던 부끄러움과 물음표를 긍지와 느낌표로 바꾸고 싶었다.”

 

백름은 이 발굴을 ‘반전’이라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미술은 언급할 가치가 없고, 연구 대상도 되지 않는다는 판단”을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반전 계기는 1999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아름전’이다. 재일조선인에게도 ‘미술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일조선인 2세들이 중심이 돼 개최한 이 전시에 재일조선인 1세 화가의 작품들이 나왔다. “재일조선인 미술가 집단의 에너지에 감동했다. 고흐나 마네 같은 서양 미술인들은 알면서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이름도, 인생도, 작품도 왜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백름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고 무시당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재일조선인 작가들이 일본 주류 미술계에서 배제되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일본 미술사에서 유명한 화가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몇몇 일본 화가들 곁에서 함께 창작활동을 했던 재일조선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이 연구대상이 되거나 혹은 작품성을 인정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들이 재일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미술계에서 재일조선인의 작품은 창작자의 출신이나 배경을 떼놓고 작품성만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더 아쉬운 점은 그들의 활동과 작품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도 제대로 기록되고 보존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재일조선인 미술가들도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데 더 치중했고, 또 생활인으로서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야 했기에 정기적이고 규모가 큰 교류를 갖기 어려웠다. 상황이 이러니 이들의 작품 활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나오지 못했다. 때문에 백름 작가 주변의 일본 미술연구가들은 그의 연구가 늦었지만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작업이라 응원하고 있다. 본인들이 지금까지 제대로 일본 미술사를 연구하지 못했다며 반성하기도 했다. 

재일조선인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국적을 부여받고 살다 1945년 해방 뒤 무국적자로 분류됐다. 남북이 분단하면서 ‘대한민국’ 지지자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지자로 나뉘었다. 재일조선인은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이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에 각각 소속되거나 가입하지 않은 이들을 통칭한다. 이들은 남북한은 물론 일본 국적도 취득하지 않았다. 백름은 연구 대상이 된 재일조선 미술가를 두고 “ ‘북한 사람’이 아니라 조선반도(한반도)에 뿌리를 두고 일본에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백름 작가는 처음으로 재일조선인 작가들의 집단 활동을 연구했다. 시작은 1947년 설립된 재일조선미술가협회다. 이후 1953년 재일조선미술회가 만들어진다. 이들의 작품들을 보면 재일조선인의 가슴과 눈은 언제나 조국을 향해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재일조선인의 생활상을 닮은 작품은 물론이고, 재일조선인의 북한 귀국, 4·19혁명, 베트남 파병 등 조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도 작품에 담아냈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가 찾아낸 <재일조선미술가화집>(1962)에 담겨있다. 백름 작가는 이 화집이 1950년대 재일조선인 미술사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한다. 그는 작가들이 주로 어디서 미술 교육을 받았는지도 추적했다.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주로 한반도 출신 유학생들이었고, 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이들은 오사카미술연구소 등지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백름은 “1950년대 전반 많은 재일조선인 미술가는 개인 자격으로 일본 공모전에 출품했다. ‘전후 일본 리얼리즘에 영향받아 민중을 위한 미술 건설을 목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리얼리즘 미술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의 생활’ ‘노동자의 파업’ ‘일본 미군기지’ ‘핵 군비 증강 반대 평화운동’ 등을 다뤘다. 재일조선인 미술가들은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단체 주최 ‘평화미술전’에도 작품을 출품했다.

한동휘, 가와사키 조선인부락(1960). 백름 제공
한동휘, 가와사키 조선인부락(1960). 백름 제공

재일조선인 미술은 현재진행형이다. 한동휘의 ‘가와사키 조선인부락’(1960)은 재일조선인 생활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가와사키 한인타운 안에는 조선인 징용마을인 사쿠라모토가 있다. ‘혐한’ 등 일본 극우의 타깃이 되곤 했다. 가와사키시는 2002년 ‘차별 없는 인권존중마을 만들기 조례’를 제정해 시행했다.

표세종(1929~ )의 대표작 ‘내년에는 우리학교에’(1958)는 민족학교 입학 전, 일본의 어느 길모퉁이에서 ‘조선’ 등 한글을 쓰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표세종의 아이들이 모델이다. 조총련계 민족학교는 최근까지 차별을 겪고 있다. 

김희려, ‘학살’(1961). 백름 제공
김희려, ‘학살’(1961). 백름 제공

재일조선인들의 남북 간 교류 노력을 발굴한 것도 백름의 연구 성과 중 하나다. “조선반도 남쪽을 지지하는 사람, 북쪽을 지지하는 사람, 중립적인 입장에 선 사람이 4·19혁명을 계기로 모여, 두 번에 걸쳐 전람회를 개최했다.” ‘재일한국백엽동인미술부’ ‘재일코리아미술가협회’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 미술부’가 1961년 도쿄에서 두 차례 개최한 ‘연립전’이다. 같은 시기 열린 문화제에도 총련계와 민단계의 문화인이 참여했다. 이 교류는 지속하지 못하다가 1993년 12월에 가서야 민단·조총련계와 다른 해외동포 미술가들이 참여한 ‘코리아통일미술전’이 열린다.

백름은 “재일조선인 작품 연구는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고, ‘주소 불명’이었던 미술 작품에 ‘주소’를 부여하는 일, 즉 적절한 소장처(관리처)를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말했다. 2016년 ‘재일코리안 미술 작품보존협회’를 설립한 것도 연장선의 작업이다. 재일조선인 1·2세의 미술 작품을 발굴·보존하고, 전람회를 개최하는 게 주요 활동이다. 재일 미술가 활동과 후세대 교육지원도 맡았다. 오는 3월 ‘재일조선인 미술사 연구에서 만난 미술 선생님들’이란 제목의 판화전을 개최한다. 1940년대 말 이후 조선학교의 판화 교육 내용과 작품을 들여다본다. 아오야마 다케미, 정광균, 하상철 등 미술 선생 활동도 소개한다. 전래동화 그림을 그린 박민의의 작품 세계도 연구 계획에 올렸다.

재일조선인 미술사 발굴은 백름 작가의 말처럼 이제 시작되었다. 그는 그동안 온전한 주소를 갖지 못했던 재일조선인의 미술 작품에 주소를 부여하는 일, 다시 말해 제대로 된 관리처를 만들어주는 일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2016년 재일코리안 미술 작품보존협회를 설립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재일조선인 1~2세대의 미술작품을 발굴 및 보존하고 전람회를 개최하는 것이 주 활동이다. 오는 3월에는 ‘재일조선인 미술사 연구에서 만난 미술 선생님들’이란 주제의 판화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1950년~60년대 조선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신 아오야마 다케미 선생님이라고 계셨다. 조선학교에서 20년 동안 미술 선생님을 하셔서 그 분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아주 많다. 제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작품도 찾아냈다. 1964년의 판화작품이다. 이 작품들을 전시하고, 동시에 다케미 선생님이 우리 학생들에게 미술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을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그분은 생전 자신이 조선학교에서 미술 선생을 하는 것은 일본이 전쟁을 통해 많은 고통을 주었다는 점을 반성하는 마음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것 같다. 그분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의미에서 전시회를 갖고자 한다. 또 학교 대선배이시기도 한 박민의 작가의 인터뷰도 준비 중이다. 그림책의 일러스트를 많이 그리신 분인데, 2세대 여성작가로서 그 분의 작품세계를 조명하고 싶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여전하다. “한국인들이 우리 재일조선인을 보고 왠지 ‘모자란 사람’이라고 합니다. ‘일본에 살면서 조선반도를 그리워 하는 어딘지 좀 모자라고 도와줘야 할 사람들’이라고 인식하지요. ‘완전한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라고 해서 심지어 제게 ‘한국인이세요? 일본인이세요?’라고 질문한 신문기자까지 있어요. 완전 마음 상했습니다. 굴욕적이었습니다.” 그는 “조선반도 평화를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제가 사랑해야 할 조선반도에 사는 같은 민족은 재일조선인을 몰랐다”고 말한다. 재일조선인 미술도 ‘일본인화된 미술인’, ‘모자란 미술인’, ‘모국을 떠난 미술인’, ‘모국과 끊긴 미술인’로 인식하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재일조선인이 어떻게 생기게 되었고, 어떻게 살아왔으며, 지금 일본 사회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 왜 조선인으로 살려는지를 살피는 입장에서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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