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평론] 존재와 부재의 사이

구글 선호 매체로 추가

권도연 전

섬광기억 #2, 피그먼트 프린트, 145x220cm, 2018
섬광기억 #2, 피그먼트 프린트, 145x220cm, 2018
비숲 2, 피그먼트 프린트, 160x120cm, 2021
비숲 2, 피그먼트 프린트, 160x120cm, 2021

 

콩나물이 살던 흙구덩이 속으로 손을 집에 넣었다. 순간 물컹하고, 차갑고 뜨뜻미지근하고, 간지럽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나를 훑고 지나갔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나는 내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봤다. 손에 엷은 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동시에 나의 내면에도 묘한 자국이 생겼는데 나는 그게 뭔지 몰랐다. 

 

권도연은 사진을 매체로 활용하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활용하는 방식은 조금 독특하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작가는 작업의 최종 결과물로 사진을 제시하지만, 그 결과물에 도달하는 과정은 통상의 시각예술가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는 사진을 촬영하는 것보다 먼저 만들기와 다듬기의 과정을 통해 대상을 모색한다.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과정은 어린 시절 종이접기를 통해 만들어 내던 세상에 대한 경이와 그것을 통해 터득한 이치를 재구성해 담은 “애송이의 여행”이나, 애송이의 여행을 통해 깨닫게 된 한정된 대상에서 확장되는 세계에 대한 발견의 기쁨을 다시금 관념적으로 재구성한 “개념어 사전”, 그리고 어떤 순간이 섬광과도 같이 각인되어 불현듯 현재화되는 것들에 터 잡고 제작한 “섬광기억”, 어린 시절 만났던 집 없는 개와의 인연에서 출발한 “콩나물” 등이 그것이다. 이들 작업은 작가가 자신의 기억에서 출발하여 너무도 일상적인 주변의 것들과 그것을 결합시키거나 혹은 일상적인 것들이 불현 듯 소환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결합시키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작가는 일상적인 것 속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드러나거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들추어낸다.

만들기 혹은 다듬기를 거쳐 촬영에 이르는 일련의 작업과정 속에서 작가는 초현실주의자들이 구사했던 데페이즈망과 유사한 전략을 구사한다. 그것은 일상의 것들을 다르게 보이게 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작가는 일상의 사물을 통상적 환경에서 이질적인 환경으로 옮기고 그 사물로부터 실용적인 성격을 배제한 후 사물끼리의 기이한 만남을 통해 새로운 감각이나 정서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방식은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로트레아몽의 유명한 싯귀 “재봉틀과 양산이 해부대 위에서의 만남”과 같이 통상적이지 않은 병렬과 배치를 통해 일상적인 것 너머의 감각을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애송이의 여행”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일상의 오브제에 작은 변화를 가함으로써 그것이 품고 있던 경이로운 세상을 드러내 보여주었다면, “개념어 사전”에서는 폐지처리장에서 수집한 사전을 이용하여 이질적인 단어와 이미지를 병치함으로써 이들이 만나 이루어내는 생경한 세계를 통해 정서를 환기시키고 있다. 또한, “고고학”시리즈에서는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 집 주변의 땅을 파고 그렇게 발견한 오브제들을 시간의 층위를 덧입은 유물처럼 제시함으로써 찌그러진 캔, 버려진 스트로폼을 낯선 모습으로 전유시키고 있다. 이처럼 사물이나 대상이 놓여지는 환경이나 상황을 조율함으로써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기능을 탈각시키고 그곳으로부터 또 다시 이질적 감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방식은 어릴적 작가의 아지트였던 책방이 장마로 침수된 후 남겨진 잔해로부터 건져 올린 감각을 극대화한 <여름 방학> 등의 “섬광기억” 시리즈나 어릴 적 공터에서 만난 유기견이나 박쥐, 물놀이의 기억 등을 담고 있는 “콩나물”시리즈로 이어진다.

어린 시절 기억에서 출발하여 만들기와 재배치하기의 과정을 거쳐 사진의 형태로 드러나는 권도연의 작품들은 정서적 군더더기를 찾아볼 수 없으리 만큼 깔끔하게 조율되어 있다. 시간의 무게가 덧입혀진 기억을 토대로 한 이들 작업은 기억의 요체만을 남긴 채 구현된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방식은 카메라 렌즈의 시선을 작업실 안에서 만들어진 대상이 아닌 작업실 밖으로 돌린 “북한산”시리즈로도 이어진다. 작업실 내에서의 사전작업을 수반하는 이전 작업들과 “북한산” 시리즈는 분명 작업방식에 있어 차이를 드러낸다. 최근의 “SF”시리즈를 포함하여 작업실에서 사전 제작을 수반하는 작업들이 사진을 촬영하기 전까지 작가의 무수한 만들기와 다듬기의 과정을 전제로 한다면, 북한산에 깃들어 살아가는 들개들을 촬영한 “북한산” 시리즈나 최근작인 밤 시간대 대나무 숲에 내려앉은 까마귀떼를 촬영한 “비숲” 작품은 한순간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촬영하는 방식으로 전환한다. 하지만, 작가는 그 한순간의 대상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작업실에서 만들기를 하며 보낸 무수한 시간만큼이나 긴 날들을 지켜보기를 통해 대상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그 모습을 포착한다. 전자의 것들이 손을 통한 만들기와 다듬기였다면 “북한산”과 “비숲” 작업은 대상과의 관계를 만들고 다듬는 관찰을 통한 다듬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이라는 결과물로 관객에게 제시되는 권도연의 작업은 사진으로 제시되기 이전 많은 시간들이 작가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는 과정, 혹은 새롭게 관계 맺는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대상을 대하는 이와 같은 태도는 이전의 작품들에서 감정의 군더더기를 발견할 수 없도록 정제된 형태로 드러났던 것만큼이나 북한산의 들개나 까마귀를 촬영한 작업들에서도 역시 정제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한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를 그들의 삶의 터전인 현장에서 촬영하였음에도 이들 시리즈에는 현장의 생생함이나 긴박감, 혹은 통상적인 일상의 무료함이 드러나기 보다는 그러한 상황 너머의 다듬어진 대표성을 드러낸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북한산”시리즈의 들개에 대해 윤원화는 다큐멘터리적 측면보다는 초상 사진적 면모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와 깊은 관련을 갖는 이러한 방법은 초기작 “애송이의 여행”에서부터 까마귀 시리즈까지 일관된 태도로 이어진다. 특히, 재개발 문제와 집단이주,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유기견 문제나 생명 다양성의 이슈들을 내포하고 있는 “북한산”시리즈나 지구환경의 변화로 까마귀떼가 날아오고, 그것이 이전의 생태계에 균열을 내며 새로운 영토를 포섭해가며 벌어지는 문제를 품고 있는 까마귀 연작에서도 작가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인 재개발 문제, 환경오염, 혹은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경시 같은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 문제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해석의 영역으로 남겨둔 채, 작가는 이질적인 장소에 놓인 이질적 존재인 들개와 까마귀떼를 통해 분명 존재하고 있음에도 존재를 거부당한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환경문제나 사회적 문제를 넘어 거기 있음과 없음, 존재와 부재와 관련된 좀더 근본적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작업태도는 이전 시기 작가가 작품의 대상이 된 사물이 가지고 있는 효용가치를 폐기하고 폐기된 상태를 통해 그 대상이 본래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의 편의에 의해 보이지 않고 드러나지 못했던 대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다가가고자 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존재했지만 드러나지 못했던, 혹은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작가는 자주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소환한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어린 시절 주변과 – 특히, 자연과 – 관계 맺는 경험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작은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 Rachel Carson이 “Sense of wonder”을 떠올리게 한다. 지식이나 앎 보다는 모든 감각을 열고 받아들이는 열린 자세를 통해 주변을 탐험하는 것이 가능했던 시절, 사물의 효용 가치나 유·무용을 전제하지 않고 대상들의 존재 자체와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잠재태를 감지한다. 어린 시절 대상과 맺었던 관계들을 소환함으로써, 작가는 기능이 퇴화한 대상을 통해 존재하지만 부재한 것들, 우리가 잃어버리고 볼 수 없어진 것들, 하지만 분명 거기에 존재하거나 존재 했던 것들을 제시하고 있다. 권도연은 사진을 ‘눈앞에 없는 것들의 존재 증명’이라 말한다. 권도연에게 있어 작업을 통해 드러내는 있음과 없음, 존재함과 부재함은 단순한 부재가 아닌 한때 존재하였으나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어찌보면 존재하였음을 내포한 부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 관장)

<편집자 주 : 본 미술 평론은 독자들의 작품 이해도를 높이고 미술 정보 전달을 위한 비상업적인 목적입니다. 저작권은 평론가에게 있습니다.>

▶ 기혜경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사진=홈페이지)
기혜경 부산시립미술관장 (사진=홈페이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에서 한국 근현대미술사로 석사와 박사를 마쳤다. 국립현대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시 ‘20세기 중남미 미술’, ‘신호탄’, ‘메이드 인 팝랜드: 한중일 삼국의 팝아트’, '올해의 작가상 2012', ‘광복 70주년 기념전: 소란스러운, 뜨거운, 넘치는’ 등 다수의 전시를 기획하였으며,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의 운영부장을 거쳐 현재는 부산시립미술관을 총괄하고 있다. 박사 논문인 '대중매체의 확산과 한국현대미술: 1980-1997'과 연구서로 『이미지 시대의 매체 vs. 미디어: 민중미술, (포스트)모더니즘, 신세대 미술의 예술적 실천들』를 비롯하여 대중매체가 범람하는 이미지 시대에 예술의 대응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한 고찰 및 한국 동시대 미술의 미술사적 정립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관련 기사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댓글 작성

0/2000

댓글은 검수 후 노출됩니다. 비방·욕설은 삭제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