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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이자 아카이브, 힐마 아프 클린트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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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마 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 전시 전경  [사진=박지수]
힐마 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 전시 전경  [사진=박지수]

2025년 8월 24일,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 전시를 찾았다. 이 전시는 지난 7월 19일 개막해 현재까지 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이끌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근대 미술사의 주류 서사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의 작품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전시는 단순히 그녀의 그림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추상 미술의 기원을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장치로 가득 차 있다.

힐마 아프 클린트는 스웨덴 출신 화가로, 생전 자신의 작품이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공개되기를 원했다. 이로 인해 그녀의 방대한 작업은 오랫동안 미술사의 기록에서 배제되었고, ‘추상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1866–1944)나 카지미르 말레비치(1879–1935)에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그녀가 남긴 수천 점의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졌다. 클린트가 이미 1906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추상적 형식을 실험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추상 미술의 기원을 새롭게 정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역사적 재평가를 뒷받침하며, 클린트의 이름을 현대 추상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로 끌어올린다.

전시장을 방문하기 전,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사진을 접했을 때 가장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반사된 작품의 이미지였다. 화면이 분산되고 집중이 흐트러질 것 같은 인상을 주어, 과연 현장에서 어떻게 느껴질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전시는 전혀 달랐다. 바닥의 반사 이미지는 오히려 공간 전체를 감싸며 작품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장치가 되었고, 관람객을 새로운 차원의 감각 속으로 이끌었다. 작품은 직접 마주했을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박지수
사진=박지수

무엇보다도 전시 공간의 구성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길게 뚫린 사각형의 구멍이 시선을 전시장 안쪽으로 유도한다. 단순한 구조적 장치처럼 보였으나, 전시 동선을 따라가다 다시 마주한 그 구멍은 액자처럼 특정 작품을 정확히 담아내고 있었다. 이 장치는 단순한 건축적 장식이 아니라, 관람객에게 이미 지나온 작품을 또 다른 맥락에서 새롭게 감상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전시장 곳곳에는 이러한 시각적 통로들이 반복적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공간과 공간은 서로를 관통하며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냈다. 

작품과 아카이브 자료의 방대한 규모 또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전시는 단순한 회고전이 아니라, 작가의 세계관을 심층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아카이브적 체험에 가깝다. 벽에 걸린 작품과 바닥에 비친 반사, 그리고 작품 앞에 서 있는 관람객의 모습까지 하나의 장면을 이루며, 마치 ‘힐마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일반적으로 반사는 작품의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지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오히려 몰입을 강화하고 외부와 차단된 작가의 내적 우주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사진=박지수
사진=박지수

이번 전시의 또 다른 특징은 클린트의 작업을 단순히 미술사적 맥락에 위치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의 방대한 기록과 아카이브를 통해 관람객에게 작가의 내적 사유 과정을 추적하게 한다는 점이다. 수많은 스케치, 메모, 도판, 연구 자료들이 함께 전시되면서 관람자는 단순히 ‘그림을 본다’는 차원을 넘어, 한 예술가의 사고와 세계관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된다.

〈힐마 아프 클린트: 적절한 소환>은 분명 회고전의 성격을 지니지만, 동시에 아카이브 전시라 부를 만하다. 만약 그녀의 작업이 치밀하게 보관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이 방대한 작품들을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전히 세상에는 제대로 기록되지 못한 작품들이 숨어 있을 것이며, 그중 일부는 먼 미래의 미술사에서 새로운 거장으로 불릴 가능성을 품고 있다. 혹은 거장으로 호명되지 않더라도, 새로운 담론을 촉발하고 미학적 전환점을 제공하는 작가가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 아카이브를 견고히 구축해 나가는 일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 미래의 미술사를 준비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부산에서 만난 이번 전시는 작품과 공간, 그리고 아카이브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관람객에게 새로운 감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전시장을 나서며, 나는 힐마 아프 클린트가 남긴 거대한 유산이 단지 한 개인의 성취를 넘어, 우리가 미래의 미술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녀의 작업이 그렇듯, 오늘날의 아카이브 역시 미래의 누군가에게 또 다른 ‘적절한 소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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