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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미인이 왔다’라는 이름을 가진 이집트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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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런 이름도 있었다. 고대 이집트어로 ‘미인이 왔다’는 뜻의 네페르티티. 그녀가 얼마나 미인이면 그 당시 이집트의 모든 여성을 제치고 미인이 왔다라고 불렸을까. 실물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사진도 남겨질리 없으니 이 궁금증을 어찌할거나. 이른바 경국지색이라 일컫는 역사적 미인들이 대부분 그들의 미모와 관련된 고사나 에피소드라도 전해주는데 비해 네페르티티는 소문조차 인색하다. 공식적인 기록도 부족해서 출신도 여러 설이 있고 말년도 명확치 않다. 아크나톤 왕과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한 왕비였다는 사실만으로 그저 미인이었겠지 하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아쉬움이 많다. 베를린 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그녀의 흉상을 통해 이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 할 수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베를린 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네페르티티 흉상
베를린 신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네페르티티 흉상

 

그녀의 미모에 대해 역사적으로 전해지는 말은 별로 없었지만 그녀의 흉상에 대해서는 경이로운 찬사가 차고 넘친다. 1912년 아마르나 유적지에서 이 흉상을 발굴한 루트비히 보르하르트는 한눈에 그 가치를 알아보고 소유하고 싶은 열망에 불타올랐다. 그는 불법임을 무릅쓰고 이집트 당국 몰래 독일로 빼돌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고 마침내 잡동사니로 위장하여 밀반출에 성공한다. 그 후 나치 정권도 유물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전쟁 중에도 안전하게 보존하기위해 애쓴 흔적이 기록에 남아있다. 다소 과장적 표현을 즐기는 역사학자이지만 명망 있는 존 줄리어스 노리치가 이 흉상이 있어 이집트 3000년 미술이 가치를 갖는다고 했을 정도니 반환을 요청하는 이집트 정부의 지속적 요구는 독일정부에 의해 오늘날까지 당연히 무시되고 있다.

 

이 흉상에 대한 사람들의 폭발적 반응은 단지 네페르티티의 미모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듯하다. 21세기에 제작되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극도의 사실성 및 자연스러움이 기존의 이집트 미술이 갖는 정형적 특성과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집트 미술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집트 미술은 신이 제시해준 것을 그대로 따르는 관행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대표 작품이 ‘나르메르왕의 팔레트’이다.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
나르메르 왕의 팔레트

 

검은 편암으로 제작된 이 기념판은 파라오 역할에 대한 초창기 개념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며 동시에 2차원 미술의 재현 관례를 보여준다. 역할측면에서 파라오는 신이 구축한 질서인 ‘마아트’가 지속되게 해야 하므로 내부 반대는 무자비한 억압으로 외부의 적은 가차 없는 정복으로 이를 구현한다. 공식 미술은 이런 이념의 전달 매체이다. 그래서 그림이 아니라 기록에 가까워진다. 장면은 납작한 저부조로 표현되며 적의 머리를 잡고 철퇴로 응징하려는 왕은 상대적으로 크게 묘사되어야 효과적이다. 원근법 개념은 없으며 인물들 사이에 상호작용과 중첩이 허용된다. 또한 장면들은 기저선 위에 배열되어 있다.

 

2차원 평면의 한계와 본질을 중요시하는 관념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모습과는 다르게 사람 형상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는데 이러한 방식은 이집트 역사에서 계속되었다. 얼굴, 팔과 다리는 옆면을 보여주며  눈과 어깨는 정면에서 관찰한 모습이다. 정면성의 원리. 이것은 파라오의 가장 완전한 형상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실질적인 동작과 어긋난다는 사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사물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네바문의 정원’이 있다. 나무와 물고기와 새들은 측면이 그 생김새와 특징을 잘 나타내고 연못은 위에서 보아야한다. 화가는 모든 사물의 본질을 잘 드러내는 각도를 고수하며 일관성 있게 그리고 있다.

 

네바문의 정원
네바문의 정원

 

둘째, 12왕조 시기에는 중요 인물을 그리거나 조각하기 위해 표준 격자표가 사용되었다. 그리드 혹은 카논이라 불리는 격자표는 제작을 용이하게 해준다. 파노프스키가 제작적 비례라고 구별한 이 방식은 가변적 현세보다 불변적 본질의 내세를 중시한 이집트인들의 사상과 관련이 깊다. 왕들은 이렇게 제작된 그들의 조각상을 자신의 복제품(또 다른 자신)으로 여겼다.

 

이러한 이집트 미술의 전통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사람이 네페르티티의 남편인 아크나톤 왕이다. 그는 조선 시대로 치자면 세조와 비슷한 인물로 비대해진 사제 집단으로부터 왕으로 권력을 이동시켰다. 차이점이라면 유혈사태가 아니라 다신교 사회였던 이집트를 태양신 아텐의 일신교로 변화시킴에 의해 신관들의 권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공고히 했다는 점이다. 다만 혁명적 변화가 틀림없는 이 시도에 거센 반대나 유혈사태가 있었는지의 여부는 기록이 없어 그렇게 판단할 뿐이다. 이 혁명이 상류계층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끼쳤으나 전반적인 이집트의 사회 혁명에 이르지는 못했다.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이나 새로운 수도인 알아마르나 이외의 지역에서는 파급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술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을 거부하고 사실주의를 선호했으며 영원을 현재로 대체했다. 왕비가 왕의 무릎에 앉아있거나 왕이 어린 딸에게 입맞춤을 하는 모습, 슬픔에 잠긴 왕가의 분위기의 묘사는 이집트 미술에서 볼 수 없는 장면들이다. 즉, 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장면들이 그려진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신경향의 완성품이 바로 네페르티티의 흉상이었고 이를 본 현대인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크나톤의 아들이자 통치가 아니라 유물로 세상을 놀라게 한 투탕카멘의 시대에는 다시 전통으로 회귀했으므로 아주 짧은 혁명의 시기에 나온 걸출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네페르티티가 남편이 죽은 후 섭정을 했다는 설이 있다. 기록이 불명확 한 것으로 보아 섭정을 했다하더라도 곧 권력을 상실했을 것이다. 후대에 인위적 조작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얼마 안 되어 역사에서 사라진다. 이집트에서 섭정을 한 여성으로는 하트셉수트가 가장 강력한 권력을 발휘했다. 유명한 하트셉수트의 장제전이 명확한 증거다. 규모나 디자인 측면에서 뛰어난 건축이 틀림없다. 하지만 네페르티티의 흉상만큼 현대인을 신비로운 전율에 휩싸이게 하지는 못한다. 신에서 인간이 된 여인. 바라보는 이에게 기이한 동질감을 선사하며 살아있는 시간을 낯설게 만드는 여인. 이집트 역사 속에 수많은 미인이 존재했건만 공식 명칭에 미인임을 상기시키는 다른 여성은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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