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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서양 미술사 칼럼' 시작에 앞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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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n Mueck 전시 전경  2017 © Marc Domage (사진=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제공)
Ron Mueck 전시 전경  2017 © Marc Domage (사진=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제공)

 

미술은 호흡 속에 있다. 의식하던 의식하지 않던, 인간에게 호흡은 불가피하다. 구석기인들이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그릴 때,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 뒤샹이 변기를 미술 작품으로 둔갑 시킬 때, 잭슨 폴록이 캔버스 위에서 손의 떨림을 수직으로 몰락시킬 때도 역시 그러했다.

미술은 도처에 널려있다. 굳이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지 않아도, 현관문을 나서면 보게 되는 건물과 광고판, 출근길에 보는 핸드폰 속 앱 디자인, 가끔씩 보는 잡지, 사람들의 옷차림, 뒷골목의 낙서, 부서진 잡동사니들 사이사이 어딘가에 얼굴을 숨기고 있다.

미술은 말하지 않는다. 묵묵히 거기 있을 뿐이다. 가끔씩 미술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느낄 때에도 그것은 소리로서 전달된 파장이 아니다. 조용미는 그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 ‘당신의 어깨를 만지며 떨어져 내린 잎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 (설령 연극의 요소를 도입한 현대 미술의 행위자가 청각이나 촉각을 이용해 당신에게 호소한다고 해도 그것은 미술이 말을 걸어온 것이 아니다.)

미술은 우리 곁에 분명 존재하지만 정확히 정의 내리기 어렵다. 대가들도 난감해 한 일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사전의 도움을 빌리자면 다음과 같다.

‘미술은 공간적 또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로, 공간 예술 조형 예술 등으로 불린다. 시각적 방법 또는 조형적인 방법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뜻을 나타내는 예술의 한 종류라고 말할 수 있다.’

한 번 읽고서는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 또한 미술과 예술은 어떻게 다른지 알 길이 없다.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조사하지 않는다면 사전은 그저 의미가 비슷한 단어를 나열 할 뿐 독자의 이해를 도와야하는 의무를 회피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정희성 시인의 표현대로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삽을 씻던가 아니면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는 장님들처럼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약간의 의지가 있다면 비록 허공에 손을 저을 지라도 코끼리를 그려볼 시도를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보아뱀이라도 그리게 될지.

 

미(美) - 첫 눈에 사로잡히는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은 무기력하다. 아름다움은 도덕을 초월한다. 첫 눈에 사로잡힌 포로들을 우리는 안다. 그들의 눈은 정처 없으며 한 순간 말을 잊는다. 특히 미인을 보았을 경우 사태는 더 심각해져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해 침을 흘리거나 턱관절이 탈구되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포로들은 이 매혹적인 경탄과 경이의 감각적 인식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하지만 드물게 왜 이런 상태가 됐는지 이유나 알아야겠다는 일부 몰지각한 포로들은 언제나 존재하는 법. 18세기 중반 바움가르텐이 미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고 감성적 인식의 학문으로 규정하자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미각 판단의 특질 및 미의 자율적 성격을 논하면서 아름다움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중세에도 일부 이러한 시도가 있었는데 이를테면 파치올리가 주장한 황금 비율 개념이 그것이다. 황금 비율이 최고로 아름다운 상태라고 강조할수록 다른 것은 비례적으로 덜 아름답거나 추해진다. 만약 개인이 어떤 것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을 때 그 대상이 황금 비율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아름다움을 모르는 인간으로 평가 절하될 위험에 처한다는 뜻이다. 황금 비율 개념을 추종하는 사회는 아름다움을 지적이고 세련되게 강요하면서 결과적으로 대중을 세뇌의 대상으로 종속시킬 뿐이다. 일부 수학자들이 느끼는 주관적 아름다움을 보편적 아름다움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 아니다. 자로 재거나 규정에 의해서 느껴질 수가 없다. 대부분 첫 눈에 사로잡혀야한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름다움에 대해 또 다른 의미의 변화가 일어났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선택하는 심판이 된 후 아프로디테와 거래를 했다. 아프로디테는 황금 사과를 받고 만족하여 약속대로 파리스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의 사랑을 얻게 해주었다.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남긴 황금 사과가 트로이 전쟁의 원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파리스의 심판 이후 아름다움에 우열을 정하는 일은 정치가 되었다.

 

술(術) - 눈보다 빠른

 

전통적으로 관람자에게는 결과만이 제시된다. 현대 미술에서 연극처럼 관람자의 참여를 유도하여 미술 행위자와 관람자간의 경계를 해체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이르다. 경계의 해체는 관념적, 논리적으로는 가능하나 현실에서는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있는 한 꾀, 재주, 수단을 의미하는 미술 행위자의 술은 고대 시대에는 주술이었고 대부분의 시대에서는 높은 경지에 이른 기술이었고 뒤샹의 시대에는 마술이 되었다. 어느 시대가 되었건 당신의 ‘밑장빼기’는 눈보다 빨라야 한다. 그 말은 술이라는 행위는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바로 꺼내야 함을 의미한다. 머리가 개입할 틈이 없이 손이 욕망과 무의식을 현현해야 성공할 수 있다. 아니면 적어도 시대를 앞서 가던가.

 

미술 - 몸을 낮추는 겸손한 사랑

 

H.W. 잰슨은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미술의 정의를 시도한다. 니체가 이 질문을 들었다면 주관적 의도를 가진 불명확한 질문이라고 반박을 했겠지만 잰슨의 의도가 불순한 것은 아니므로 나름 유용하게 보인다. 그는 미술은 무엇보다 하나의 언어로서 그 속에는 미술의 이상과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다고 했다. 이는 미술이 언어로 제한된다면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관념적이고 근대적인 성격 및 한계를 반영한 개념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총체적인 정의를 내리지는 않고 미술의 특성으로 상상력, 창의력, 독창성과 전통, 의미와 양식, 자아 표현과 대중, 그리고 취향을 꼽으면서 마치 화가가 점묘법을 구사하는 방식으로 뚜렷한 윤곽선이 없는 글을 서술하고 있다. ( 그의 정의 방법은 니체의 예측 안에 있다.)

곰브리치는 미술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썼다. 미술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하기도 했고 고유 명사의 미술은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그 뒤로 연결된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은 우리를 더욱 혼란에 빠트린다. 미술이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미술가가 존재할 수 있는가. 과연 미술가들만이 존재하는 미술사가 성립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는 있지만 독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지나치게 과감하고 단정적인 표현을 쓰면서 용어의 혼동을 야기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예측컨대 서양 미술사의 서술을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미술가를 중심으로 썼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서슴없이 비문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충격요법으로 인해 독자들은 한동안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어야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재미있는 역설을 발견 할 수 있다. 고유 명사적인 미술의 존재를 부정하면 이러한 모든 행위를 미술이라 불러도 무방하다는 그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관념은 조건에 따라 무일수도 있고 전부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떠올려보자. 어쩌면 우리는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그의 논리에 따라 근대적 개념의 협의의 미술을 부정하고 통시적 개념의 광의의 미술을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곰브리치는 칼 포퍼가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출판할 때 상당한 의견 공유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퍼가 과학의 반증주의 이론을 정치 사회적으로 적용함에 있어 많은 도움을 줄 정도의 논리적 기반을 갖춘 사람이라 그의 논리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포퍼라면 가능해 보인다. 아마 포괄적 개념을 빈번하게 사용한 아들러의 수법을 역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문장은 혼란스럽다. 결론적으로 근대에 형성된 미술 개념은 너무 제한적이고 관념적일 뿐이어서 실재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비록 표면적이었지만 효과적이었고 새로운 서술법은 강조되었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미술의 개념을 정의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마르크스 주의에 충실하게 그 시대의 사회적 조건과 예술 양식의 관계를 규명하는데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마르크스 이론이 잘 들어맞는 사회는 선사시대에 그쳐서 그 이후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그의 작업은 힘겨워 보인다.

미술 - 이라는 언어만이 남았다. 말은 성기고 척박하다.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기에 언어는 늘 부족하고 저 만큼 비껴있다. 늘 그렇듯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경향이 있다. 미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길고 긴 인간의 역사를 놓고 보면 미술이라는 언어가 등장한 시기는 비교적 최근의 일이므로 수 십 만 년의 시간을 아우르기엔 아직 호흡이 버겁다. 미술을 더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미술가 혹은 미술 행위자들의 역할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미술과 미술가들은 곰브리치가 주장하듯 단절된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과거에도 이들은 상호 협력 하에 역사 속에서 인간의 행위를 기록해 왔으며 창조적 결과물들을 생산해왔기 때문이다. 미술가 덕분에 미술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꽃 피워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래지않아 미술은 더 풍부해지고 확장된 개념을 획득할 것이고 그때가 되면 미술을 제대로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철학이 인간을 신 앞에 두고자 했던 시도들 때문에 인간은 교만해졌다. 미술도 덩달아 우쭐대는 모습이 보인다.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만 겸손해진 미술의 모습이 보고 싶다. 피에타 상을 바라보며 미술을 저 위치에 놓으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미술이 신의 위치에 선다면. 만약 그렇다면.

신이 된 미술의 영전에 겸손한 사랑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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