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의 전자 회로를 잇는 또 다른 감각 — 아프리카 정체성과 인간 존재를 탐구하는 보아포의 세계
영상=한국미술신문 윤혜현
경주 우양미술관이 백남준 특별전의 여운을 이어, 가나 출신 현대미술가 아모아코 보아포(Amoako Boafo)의 아시아 첫 미술관 개인전 《I Have Been Here Before》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 전시는 오는 11월 30일까지 열리며, ‘존재의 기억’을 주제로 인간의 얼굴과 정체성, 그리고 문화적 뿌리를 탐구한다.
보아포는 손가락으로 직접 물감을 바르는 ‘핑거 페인팅’ 기법으로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작가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강렬한 색채와 생생한 표정으로 화면을 압도한다. 이는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흑인 정체성과 인간 존엄의 상징이자, 그 자신이 살아온 사회적 경험을 담은 시각적 언어다.
우양미술관 내부
우양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보아포의 회화 세계를 건축적 공간과 결합해 새롭게 해석했다. 전시는 네 개의 테마로 구성됐다. ‘Shall Gaze’에서는 관람자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인물들이, ‘State of Being’에서는 내면의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들이 등장한다. ‘Posturing and Posing’에서는 몸짓과 자세로 표현된 자아의 형상이 펼쳐지며, 마지막 섹션인 ‘Space for the Divine’에서는 회화와 설치가 결합된 상징적 공간이 완성된다.
특히 마지막 공간은 이번 전시의 백미다. 보아포는 건축가 글렌 드로쉬(Glenn DeRoche)와 협업해, 한국의 전통 한옥 구조와 아프리카의 직조 문화를 결합한 설치 공간을 만들었다. 나무, 천, 자수 패널로 구성된 이 공간은 마치 한국의 마당을 닮은 구조 속에서 관람객이 회화와 건축, 색채와 빛을 동시에 체험하도록 설계됐다. 보아포는 이를 “조상의 기억과 현대의 공간이 공존하는 장소”라고 설명했다.
우양미술관은 이 전시를 “새로운 감각의 전시 실험이자 문화 간 대화의 장”으로 소개했다. 미술관 관계자는 “백남준이 기술로 인간의 회로를 탐구했다면, 보아포는 색과 육체로 인간의 존재를 탐색한다”며 “두 전시는 서로 다른 매체를 통해 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밝혔다. 실제로 우양미술관은 백남준 전시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보아포 전시를 병렬적으로 구성해, ‘회로’와 ‘색채’라는 두 언어를 연결했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시각적 아름다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보아포의 작업은 흑인의 얼굴을 기록하면서도, 인종의 상징을 넘어 인간 보편의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는 “내가 그리는 것은 흑인이 아니라 인간이다. 다만 그 인간은 흑인일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처럼 그의 그림은 사회적 범주를 해체하고, 개인의 내면과 자존을 긍정하는 선언이다.
경주는 불국사와 첨성대, 그리고 돌과 금속의 역사로 상징되는 도시다. 그 도시에, 손가락으로 빚은 색의 얼굴들이 들어섰다. 흑인의 피부색, 아프리카의 기억, 그리고 현대적 공간이 겹쳐지며, 경주는 또 한 번 ‘시간과 문화의 교차점’이 되었다. 전통의 도시가 세계의 언어로 확장되는 순간, 예술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명 대화의 통로가 된다.
전시를 보고 있으면 백남준의 전자 회로와 보아포의 색채 회로가 묘하게 겹친다. 하나는 전류로, 하나는 피부로 인간을 표현하지만, 결국 그들이 말하는 건 같다. “나는 여기 있었다.” 전시 제목처럼, 보아포는 존재의 흔적을 캔버스 위에 새긴다. 그의 초상 속 인물들은 말없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그 눈빛 속에서 관람자 역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우양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공간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작가들과 만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기술의 회로를 탐구한 백남준과, 인간의 얼굴을 통해 존재의 회로를 그린 보아포. 두 전시는 서로 다른 방향에서 출발했지만, 결국 인간이라는 동일한 중심으로 모여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