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羽) 소생蘇生_reviviscence
"<깃>(羽)들다"
<깃>(羽)은 내가 바라보는 시선들에 대한 안내자이다.
보이지 않는 온기, 감정들을 미묘하게 대신하여 보여주곤 한다.
선택보다는 포기하는 데 익숙해진 불안한 현실에 살지라도
시공간의 제한을 넘나들 수 있는 존재,
<깃>(羽)은 최소한으로 행복해지는 꿈을 꾼다.
삶 속에 살아 숨 쉬는 또 다른 일부가 되어
잠시 멈추어 <깃>든다.
아늑하게 스며든다.
<깃>이 연상시키는 첫 이미지는 어떤 흐름에 존재를 맡기는 비선형적인 운동성일 것이다. <깃>의 운동성에는 ‘비상’과 ‘하강’의 운동이 포함된다. 예기치 않은 바람을 만난 <깃>은 급격히 공중으로 비상한다. <깃>은 결코 완만히 그리고 직선적으로 상승하지 않는다. 허공에 긴 곡선을 그으면서 순식간에 하늘로 날아오른다. 하지만 바람과 기류가 없을 때, <깃>은 완만히 낙하한다. 이 또한 직선적인 낙하가 아니며, 상승할 때와 마찬가지로 오르락내리락 곡선을 그리며 하강한다.
그러면 <깃>의 비선형적인 급격한 비상과 완만한 하강의 운동성을 통해 작가는 어떤 은유와 상징들을 드러내려는 것일까? 그리고 작가는 왜 자기 예술세계의 화두를 <깃>에다 맞추었을까? 작가에게 <깃>은 어떤 비의(秘儀)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작가가 오랜 세월 동안 절차탁마해온 <깃>의 내포적 은유와 외연적 상징들을 막연하게나마 추론해볼 수 있을 뿐이며 작가 또한 <깃>에 대해서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짤막한 힌트만 제시할 뿐, <깃>의 근원적 비밀을 우리들에게 설명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은 언어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깃>의 운동성에 내포된 의미를 먼저 살펴보자. <깃>의 특징인 비선형적인 운동에서 우리는 ‘존재의 가벼움과 우발적 현존’, ‘실존적 취약성’ 등의 의미를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상승과 하강의 비선형적 <깃>의 운동성은 <깃>이 어느 순간 어느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러한 본원적인 예측불가능성 속에서 <깃>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기의 흐름에 따라 그저 허공에 내동댕이쳐진다. 이것은 곧 실존주의적인 부조리(absurdité)라기보다는 오히려 실존주의적인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인간은 이 세계에 그냥 내동댕이쳐진 존재) 혹은 선소여성(先所與性, Vorgegebenheit: 나의 의도적 선택과 관계없이 미리 주어져 있는 세계)이라 볼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깃>의 우발적 운동성에 투사된 내포적 은유는 ‘삶의 우연성’을 의미하고 있다.
이어서 <깃>이 표현하는 외연적 의미는 무엇일까? <깃>의 운동성은 ‘급진적 희망’과 ‘점진적 절망’을 상징한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상승을 희망으로, 하강을 절망으로 대치한다면 바람에 의해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깃>은 희망과 절망이 끊임없이 교차되는 삶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하지만 절망을 상징하는 <깃>의 느린 하강은 미세한 기류의 변화에도 언제라도 다시 창공으로 솟아오른다는 점에서 결코 항구적인 절망일 수는 없다. 오히려 하강에서 상승으로의 가역적 운동성에서 작가는 희망의 <소생 蘇生>을 간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는 <깃>의 비선형적인 운동성으로부터 인생의 상승기류와 하강기류에 표류하는 삶이 늘 절망스럽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깃털’의 부드러움과 포근함은 존재의 기약 없는 표류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고요한 피난처와 따뜻한 안식처를 제공한다. 작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항구적인 행복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깃>이 만들어내는 안온한 가상현실 속에서 우리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아늑함과 행복감에 젖을 수 있다. 어쩌면 이런 특징들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깃>의 어떤 신비한 마력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미세한 기류의 변화에도 나부낄 수밖에 없는 실존자들의 운명을 닮은 <깃>은 작가에 의해 마침내 또 하나의 새로운 신화를 탄생시킨다. “가장 절실한 초월의 힘은 가장 연약한 존재에서 태동된다.”
이제 관객들은 <깃>이 은밀히 지니고 있는 신화가 작가의 모든 작품들 속에서 은유와 상징의 모습으로 줄기차게 구현되고 있음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글. 박창호 (고음악평론가, 철학박사)
<편집자 주 : 본 미술 평론은 독자들의 작품 이해도를 높이고 미술 정보 전달을 위한 비상업적인 목적입니다. 저작권은 평론가에게 있습니다.>